[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64>

  • 입력 2009년 8월 23일 14시 49분


[제34장 잿더미]

노민선이 쏜 총알이 글라슈트의 가슴뿐만 아니라 최볼테르의 심장까지 관통한 시각, 남앨리스가 눈을 번쩍 떴다. 왼손과 뽑혀나간 오른 팔뚝 그리고 두 발을 결박당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좌우로 두개골을 채운 진열장이 보였다. 다시 통나무집 안으로 끌려 들어온 것이다. 진열장 바로 아래 쓰러진 이는 검은 피부의 서사라가 분명했다. 몸을 굴려 사라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2미터 남짓 나아가다가 멈췄다. 사지를 결박한 줄이 바닥에 단단히 고정된 것이다. 힘껏 당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원숭이 꼬리!

앨리스는 자신을 이곳까지 끌고 온 반인반수족이 갑자기 생각났다.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 훔쳐보는 것은 아닐까. 몸을 웅크린 채 실눈을 뜨고 살폈다. 인기척은 없었다. 그 대신, 무엇인가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변화를 느꼈다. 그리고 곧 알아차렸다.

말꼬리가 없다!

처절하게 맞붙은 격투의 흔적도 말끔히 사라졌다.

원숭이 꼬리가 치웠단 말인가. 낑낑대며 말꼬리를 끌어내기도 어렵지만, 부서진 진열장과 금간 벽과 떨어진 박제들을 어떻게 처음으로 되돌린단 말인가. 말꼬리와 싸운 것이 꿈이었던가. 통나무집으로 들어서자마자 가격을 당하고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욱신거리는 허리와 삐걱대는 발, 입 안 가득 고인 피비린내, 그리고 무엇보다도 뽑혀나간 오른손이 말꼬리와의 치열했던 싸움을 증명한다. 나는 말꼬리와 싸웠고, 사라를 구해 나오다가, 원숭이 꼬리에게 당했다. 그렇다면 여긴……?

"다른 집이에요."

사라의 목소리다. 톤이 높고 또박또박 분명한 음성.

앨리스가 엉거주춤 앉아서 사라와 눈을 맞췄다.

"괜찮아요?"

"견딜 만해요. 괜찮아요?"

"견딜 만해요."

둘은 잠시 소리 없이 웃었다.

"다른 집이라뇨?"

"저도 추측이지만…… 남 형사님이 굉장히 심하게 싸우는 소릴 어렴풋이 들었답니다."

"반인반수족, 말 인간입니다."

"형사님 등에 업혀 나올 때, 그놈 시체를 봤지요. 그리고 저것들도!"

사라가 턱을 치켜들었다. 시선을 따라가니 짐승들의 박제된 머리가 주르륵 박혔다.

"그런데요?"

앨리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사라의 설명을 차근차근 듣고 있기가 답답했다.

"순서가 바뀌었네요."

앨리스의 미간이 펴졌다. 순서가 바뀌었다?

"거기선 곰, 사슴, 매 이런 순이었는데, 저긴 사슴, 곰, 매거든요. 여긴 다른 집이에요. 물론 두 집은 크기와 실내 구조가 동일하고 진열장의 내용물까지 똑같지만."

"납치된 사람치고는 너무 차분하네요. 여기가 어딘지 예전부터 아는 사람 같습니다."

앨리스가 슬쩍 넘겨짚었다. 사라의 지나친 차분함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관찰과 추리는 로봇 트레이너가 아닌 형사의 몫이다.

"맞아요. 내가 왜 여길 모르겠어요. 며칠씩 밤을 지새운 곳인 걸요."

사라가 태연하게 답했다. 앨리스의 입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숙식을 했다 이 말입니까? 대체 여기가 어딥니까? ……혹시 여기가 글라슈트의 비밀 연구소입니까? 자연인 그룹을 피해 숨어 글라슈트를 정비하던 곳?"

"역시 보안청 형사님이신지라 예리하시네요. 맞아요. 글라슈트 팀만의 비밀 거처죠. 특별시의 최첨단 통신시설로도 잡히지 않는, 인적이 드문 깊은 산 속 통나무집이랍니다."

앨리스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라를 납치한 반인반수족이 글라슈트 팀의 비밀연구소로 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반인반수족과 팀원 중 누군가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누가 이곳을 비밀 연구소로 정했나요?"

"누가 이곳을 비밀 연구소로 정했냐고요? 그야 당연히 최 볼테르 소장님이시죠."

"최 소장이 정했다? 확실하죠?"

앨리스의 반복된 물음에 사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왜 그러시죠?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닙니다. 헌데 우린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죠?"

앨리스가 말머리를 돌렸다. 사라와 볼테르의 눈물겨운 사랑이야기를 석범에게서 전해들은 것이다. 볼테르가 문제라면 사라 역시 의심스럽다. 가면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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