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50>

  • 입력 2009년 8월 3일 13시 25분


앨리스가 통나무 벽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꺼칠한 나무껍질이 등에 닿았다. 귀를 기울였지만 비명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거북 등딱지 모양 나무 손잡이를 쥐고 천천히 밀었다.

삐걱!

소리와 함께 잠시 멈췄다. 서늘한 바람이 앨리스의 손목을 휘감았다. 실내는 어두웠고, 박제된 채 벽에 붙은 독수리와 곰과 사슴의 눈이 그녀를 노려보는 듯했다. 이번에는 등을 문에 대고 팔꿈치로 천천히 손잡이를 밀었다. 넓은 방 가운데 탁자 세 개가 길게 덧대어 놓였고, 좌우 벽을 따라 놓인 진열장에는 실험용 두개골이 가득 했다. 탁자 위에는 과자 껍질과 빵 부스러기가 어지러웠다. 반인반수족과 사라는 보이지 않았다.

뭐야 이게?

앨리스는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며 집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화장실과 침실까지 살폈지만 먼저 집으로 들어간 이들을 찾지 못했다.

앨리스는 두개골들을 노려보며 진열장을 따라 걸었다. 각 두개골 앞에는 일련번호와 년대가 붙어 있었다. 1901, 1903, 1944, 1987. 2000년을 넘긴 두개골은 하나도 없었다. 건너편 진열장으로 가서 다시 훑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두개골 수집광이 있다더니…….

그녀는 미디오스피어에서 두개골만 만 점 이상 모은 기업가의 수집담을 읽은 적이 있다. 이 기업가는 유럽 백인이 다른 인종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세계 각지의 두개골을 모았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을 입증할 연구는 나오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두개골을 모으는 일 자체가 즐겁고 행복했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듯 재미있었냐는 물음에 이 기업가는 '두개골과의 대화'를 꼽았다. 늦은 밤 양초만 하나 켜두고 두개골을 꺼내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으음!"

앨리스가 신음소리를 내며 다시 진열장을 향해 걸었다. 이번에는 급히 걸음을 떼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신중을 기했다. 그리고 반대 쪽 진열장으로 천천히 걸으며 숫자를 셌다.

"……다섯, 여섯, 일곱!"

두 걸음 차이가 났다. 출입문을 기준으로 왼쪽으론 진열장까지 다섯 걸음인데 반해 오른쪽으론 일곱 걸음인 것이다.

앨리스가 진열장을 향해 총을 겨누는 것과 동시에, 그녀에게서 세 걸음 아래쪽 진열장이 빙글 맴을 돌았고, 반인반수족이 허공을 날아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가 총을 쏘는 속도보다 반인반수족의 앞발이 그녀의 손목을 때린 속도가 더 빨랐다.

"윽!"

앨리스는 총을 놓쳤을 뿐만 아니라 오른 손목이 꺾이면서 부러졌다. 무서운 파괴력이었다. 그녀는 꺾인 오른 손목을 왼손으로 받쳐 들고 서너 걸음 물러섰다. 꼬리가 찰랑찰랑 제 엉덩이를 쳤다. 검은 안경에 콧수염을 길렀고 긴 머리카락이 이마와 왼쪽 눈을 덮었다.

"어떤 쥐새낀가 했더니, 남 앨리스 형사셨군."

"으…… 너 뭐하는 새끼야? 날 알아? 어떻게 알아?"

"은석범 검사랑 남앨리스 형사를 모르는 반인반수족은 없지. '토러스(Taurus)' 형님을 살해하고도 감옥에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벌금 한 푼 안 낸 보안청의 귀한 나리들이시니까."

"토러스?"

토러스. 황소자리다.

앨리스의 시선이 반인반수족의 꼬리에 머물렀다. 말꼬리다. 말꼬리!

"4인조 중 하난가?"

"4인조?"

"소, 개, 말, 원숭이! 역시 네놈들이었어. 네놈들이 고교생 방문종을 급습했지?"

지하도로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기계로 만든 꼬리는 반인반수족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우릴 공격한 건 보안청이 먼저야. 처음엔 토러스 형님을 그 다음엔 캐니스 메이저(Canis Major, 큰개자리) 형님을 무참히 죽였지."

"무슨 소리야. 우린 개꼬릴 죽인 적 없어."

"변명은 저승에서 듣기로 하고, 어서 덤벼! 저승으로 보내드리기 전에 특공무술에 능한 남형사님 솜씨를 한 번 봐야겠지?"

말꼬리가 늠름하게 걸어 나왔다. 앨리스가 뒷걸음질을 치며 물었다.

"전부 다 네놈들 짓이야?"

말꼬리가 답했다.

"참 말 많네…… 그래 우리가 다 죽였다고 해두자고. 달라질 건 없으니."

그리고 앞발 둘을 높이 쳐들었다가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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