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62>

  • 입력 2009년 4월 1일 13시 31분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란 시를 읽었을 때, 석범은 생각했다. 되돌아와서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간 이는 없었을까.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가지 않은 길'이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무한대로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즉 가지 않은 길은 단수가 아니라 언제나 가지 않은 길'들'인 것이다.

윤정에게서 따귀를 맞으며 석범은 다시 이 시를 떠올렸다. 다른 길, 또 다른 길들을 찾아 헤매는 것은 작가에겐 멋진 삶이지만 그에겐 너무나도 불편했다.

"네 엄마 짓이라고 정말 믿는 게냐? 엄마의 책을 한 권 아니 한 줄이라도 읽어보았다면, 그녀가 이 테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알 게다."

석범이 손바닥으로 제 뺨을 감싸며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항상 이런 식이지요. 우두머리는 멋진 말만 하고 어떠한 불법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전부 아래 사람들, 일부 과격파가 벌인 일이라고들 둘러 댑니다."

"자연인 그룹은 테러 집단이 아니야!"

"그만 두세요. 특별시민 모두가 착한 사람은 아니라는 말과 뭐가 다른가요? 빌딩 하나는 완전히 내려앉았고 방송국 사무실 두 개가 전소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지요. 특별시연합 경찰은 자연인 그룹을 유력한 테러 용의 집단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보노보>를 개국하기로 특별시에서 정한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자연인 그룹 명의의 성명서가 발표되었습니다. 자연인 그룹을 소탕해야 합니다. 그 최고 우두머리가 누구란 건 왕고모도 아시죠?"

윤정은 즉답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석범을 향해 다가왔다. 시원한 밤바람이 석범의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혔다.

또 뺨을 후려치려는 걸까.

윤정이 그의 손을 쥐었다. 작고 주름진 눈에 눈물이 어렸다.

"……왕고모!"

눈물이 주르륵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그의 손등에 떨어졌다. 뜨겁고 뭉클했다.

오늘 아침 윤정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마음의 문을 닫고 또 닫았다. 왕고모가 그를 찾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다.

가지 않으리라.

결코 가지 않으리라.

이제 와서 새삼 혈육의 정 운운 하는 꼴이 우스웠다.

그런데 왕고모가, 운다. 온 세상이 디지털 액터와 유비쿼터스 기술과 로봇과 또 무엇무엇으로 바쁘게 돌아가도, 재빠른 세월의 핵심을 틀어쥐고 조용하지만 한결같이 버티던 왕고모가, 운다. 그 눈물은 석범이 닫아건 마음의 빗장을 하나하나 녹인다. 이 눈물은 뜻밖이다. 뜻밖의 눈물 위에 뜻밖의 제안이 덧붙는다.

"네 뜻대로 해 주마."

"예? 제 뜻대로 해주다뇨?"

석범은 윤정의 말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물었다.

"네가 와서 손미주를 체포해가도 좋다는 말이다."

"왕고모! 대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윤정이 한 걸음 물러서며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턱을 약간 치켜들고 석범을 쳐다보았다.

"멍청한 녀석! 똑똑히 잘 들어. 네 엄마 손미주가 그러더구나. 자기는 테러와는 무관하다고. 자기 때문에 고통 받는 동지들이 생겨 가슴 아프다고. 그리고 특별시 보안청에 가서 죄가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면 은석범 검사가 자신을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석범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 혼자는 안갑니다 아니 못갑니다. 테러에 이어 납치와 인질극이 이어질 거라는 풍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손미주 여사에게 전하세요. 그렇게 아들이 보고 싶으면 오염지대를 벗어나서 쿼런틴 게이트까지 오라고."

"석범아! 내 말을 믿어야 해. 네 엄만 죽어가고 있어. 쿼런틴 게이트는커녕 집 안마당까지 나올 힘도 없어. 하루라도 빨리 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될 게다."

석범이 목소리를 낮췄다.

"특별시를 떠나던 날 제가 손미주 여사께 물었지요. 지금 떠나면 평생 후회할 거라고. 그때 여사께선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후회할 일이면 후회해야지! 왕고모, 촬영 멋지게 하세요. 대낮엔 햇볕이 뜨거우니 드문드문 쉬기도 하시고요. 자전거로 실크로드를 완주하는 드라마라고 들었습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오염지대가 늘어나서 실크로드 여행 자체를 만류하고 싶지만 들을 분이 아니니, 최대한 신속하고 안전하게 오염지대를 통과하도록 미리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왕고모! 그럼, 저는 이만 갈게요. 손 여사 일로는 다신 뵙지 않았으면 합니다. 건강 잘 챙기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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