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60>

  • 입력 2009년 3월 30일 13시 39분


인간은 의심하는 동물이다. 호기심을 넘어서, 주변의 모든 것들을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기!

"그랬구나. 난 선물도 준비 못했는데……. 어쨌든 생일 축하해. 대신 근사한 저녁을 살게."

석범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앨리스는 맞은 편 의자에 앉은 후 과장스럽게 양손바닥을 맞부딪혔다.

"정말요?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아침 점심 다 대충 건너뛰었거든요."

그래도 어색함이 사라지지 않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석범은 디너 코스에서 '일 모데르노(Il Moderno)'를 선택 한 후 와인 '트라피체 말벡 2028'과 생일케이크를 주문했다. 웨이터는 생일 축하 연주를 원하느냐고 물었고 앨리스는 찰랑찰랑 단발머리를 가로저었다.

"…… 정말 이뻐."

"그렇죠? 특별시에서도 내추럴 빌딩 인공정원에서 바라본 야경은 알아준답니다."

석범이 앨리스의 초록 눈동자를, 하얀 빰을, 붉은 입술을, 깊게 팬 쇄골 뼈를 차례차례 쳐다본 후 다시 그녀의 눈동자로 올라갔다.

"야경 말고 남 형사!"

앨리스는 석범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가만히 있었다. 석범과 함께 일한 지도 벌써 3년이 훌쩍 넘었다. 그 사이 스티머스를 제작하고 대뇌수사팀을 창설하고 각종 흉악범들을 잡아들이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칭찬과 다짐과 격려의 말들이 오갔지만, 석범이 그녀에게 "이뻐!"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앨리스가 벗은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담엔 이러고 한 번 잠복근무를 할까 봐요."

가벼운 농담으로 말머리를 돌릴 작정이었지만, 석범이 다시 진지하게 싯귀를 읊었다.

"나는 요정을 믿지 않았다 /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트라피체 말벡 2028'이 왔다. 와인잔을 든 앨리스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레이스 캘리를 생각하며 옷도 사고 화장도 했는데, 정확하게 그녀를 찬미하는 시가 석범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앨리스는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론 석범이 이 시각에 자신을 내추럴 빌딩까지 부른 이유가 궁금했다.

데이트가 아니라면 뭐란 말야?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면서, 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면서, 벅찬 낭만으로부터 현실로 접어들었다.

"말씀하십시오."

딱딱하고 사무적인 여섯 글자에 석범도 느슨한 시선을 거둔 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연쇄살인범은 스티머스의 존재를 속속들이 아는 게 틀림없어. 어떻게 그 비밀이 샜는지를 따로 수사할 필요가 있겠지."

"비밀이 샜다는 말씀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하나하나 전부 체크하자고. 먼저 우리 내부부터."

"내부라면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혹시 성 선배와 지 선배를 지금 의심하십니까? 말도 안 됩니다."

"범인이 스티머스를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럼 왜 성 선배와 지 선배만 의심하십니까? 저도 대뇌수사팀원입니다."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먹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앨리스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석범을 쏘아보았고 석범은 웨이터가 나갈 때까지 창밖을 살폈다. 멀리 로봇 격투기 전용 경기장의 불빛이 훤히 밝았다. 오늘부터 '배틀원 2049'가 시작된 것이다.

"저도 뒷조사를 하십시오."

앨리스는 웨이터가 나가자마자 목소리를 높였다.

"남형사! 진정해. 나도 그들을 믿고 싶지만 변주민과 관련해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거든."

"석연치 않은 점이라고요? 그게 뭐죠?"

석범이 대형 유리창에 자료 하나를 띄웠다. 변주민의 개인 컴퓨터를 분석한 자료였다.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들이 종류별로 나열되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모두 음악파일이야. 동료들에게 물어봐도 변주민은 시합 대기실은 물론 링에 올라가서도 계속 음악을 들었다더군."

"근데요?"

앨리스는 맥락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따지듯 물었다.

"그 방 말이야. 변주민이 죽은 자취방. 남 형사는 그날 내근을 해서 잘 모르겠지만, 방음이 영 엉망이더군. 볼륨을 조금만 높여도 옆방 사람들에게 항의를 받을 만큼 벽이 얇고 구석엔 구멍까지 뚫렸어. 그런 곳에서 이 많은 음악을 들으려면 당연히 헤드셋이나 이어폰을 썼겠지?"

앨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어. 동료들 증언으론 변주민은 늘 헤드셋을 쓰고 다녔다더군."

"그, 그럼 뭡니까? 성 선배나 지 선배가 변주민의 헤드셋을 감췄다는 겁니까? 보안청 형사가 뭣 때문에 좀도둑질을 합니까?"

석범이 깍지 낀 양손을 뒷머리에 대며 답했다.

"나도 그게 궁금해. 그러니 잘 살피라고.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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