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44회)

  • 입력 2000년 2월 8일 20시 19분


치켜든 두 팔 아래에서 아이 둘은 왼쪽 측면을 보고 있으며 다른 한 아이는 오른쪽에서 정면을 향하고 있지요. 오른쪽 아이는 어머니의 외투 자락을 들치고 장난스럽게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데 왼쪽의 큰 아이는 놀란 얼굴이 되어 어머니가 바라보는 시선 쪽을 올려다 보고 있구요 그 아랫편의 아이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밖을 내다보고 있어요. 그림의 제목은 괴테의 시 구절인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칠십육 세의 노파가 그린 것 같지 않게 힘이 있고 너무나 생생해서 요즈음 화가들이 보면 재미없다고나 해야 할 단순한 그림이어요. 글쎄 그 까짓 그림 하나 그리는 일 가지고 얼마나 복잡한체 하는데. 아, 나는 이제 마흔 살이 되어서야 겨우 사는 일에 대한 눈치를 채고 있는 중이예요. 여기 그네의 일기에서 몇 자 옮겨 두려고 해요.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삶 전체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아주 나이 든 사람은 내향적이고 무감각하다. 그래, 하지만 덧붙인다면 이 내향적인 것은 아주 순수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어머니의 존재가 늘 그러했듯이.

늘상 그렇듯이, 누군가를 묻고 애도하고 그러나 비통하게 울지는 않으면서 항상 내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감정이 북받쳐오른다. 내일이면 이러한 감정을 더 이상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살자. 모든 것은 지나간다.

남자들이 같은 남자들을 죽인 전쟁의 세기를 보내면서 내면적으로는 그와 함께 살해한 모성을 생각해요. 나도 스스로 내 안에서 그것을 죽였어요. 당신을 앗아간 것들이 나로 하여금 스스로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어요. 나는 이 위대한 자연을 회복하고야 말 것입니다.

지금 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정희가 운전을 해주어서 갈뫼에 내려왔지요. 또 한 해가 지나가려 합니다. 나는 지난 달에 당신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했어요. 물론 감옥으로 보낸 것은 아니고 당신이 언제 나오게 될지도 모르면서 누님에게 보냈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자유를 얻게 될 때면 아마 나는 이 세상에 없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어요.

편지에서 밝힌대로 나는 아파요. 병원에도 갔었어요. 몸 상태가 어쩐지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살갗이 마른 생선의 껍질 같은 느낌이었지요. 소변을 보느라고 변기에 앉았는데 이상하게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나오는 거예요. 내려다보니 온통 붉은 색으로 가득차 있었어요. 아픔은 별로 못 느끼겠는데 하혈을 한 거예요. 정희에게 전화로 물었더니 당장 달려왔고 그 길로 함께 대학병원에 갔죠. 검사결과가 나왔는데 의사가 우물쭈물하고 정희도 눈물 바람을 하고 그래서 뭔가 된통 걸렸구나 생각했어요. 놀랄 일을 하두 많이 겪어서인지 나는 오히려 담담해지더군요. 입원수속 마치고 개인 병실에 들어가 눕기 전에 정희에게 화 내지 않고 침착하게 물었답니다. 내가 뭔가 중병이 들었거나 절망적이라면 누구보다도 내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인간의 품위를 지키면서 정리 정돈을 할 것이 아니냐 그랬어요. 자궁경부암이래요. 방사선 치료도 받고 항암제도 투약했는데 통증은 많이 가셨지만 어쩐지 예감이 안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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