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42)

  • 입력 2000년 2월 6일 19시 49분


돌아온 뒤로 해마다 방학이 되면 이곳에 왔어요. 여기도 많이 변했죠. 흥청망청 마시고 떠드는 가라오케 확성기 소리와 기름진 고기를 굽는 냄새가 과수원 동네의 고즈넉한 시냇물 소리며 상큼한 바람 냄새를 다 망쳐 버리고 말았어요.

이제는 지방 어느 대학의 선생이 되어 학교 근처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요. 세계가 변했다지만 여기는 옛날과 변한 게 하나도 없고 사람들은 더욱 파편처럼 쪼개졌어요. 이젠 다 이루었다는 것처럼 보여요. 친구들끼리 뿐만 아니라 가족과 부모형제 사이에서도 재물은 가장 중요한 친소의 기준이지요. 갑자기 가난해지거나 물질의 바탕을 상실하면 어쩌려고들 그러는지. 이제 저러다가 큰코 다칠텐데. 타성에 빠진 대중, 이상주의가 없어지고 쾌락만 남은 젊음, 위선과 기회주의가 가장 빠르게 이길 수 있는 덕목이 되어버린 정치, 여론의 노골적인 조작과 왜곡, 대중이 타락되는 것은 과거의 폭력적인 지배의 상처 때문일 거예요. 오랫동안 자유가 제한된 사회에서 살다보면 창조적인 힘이나 정신적 풍요로움 자체를 두려워 하고 변화를 싫어하게 된다지요. 아직도 길은 멀고 당신은 그대로 제자리에 있는데 모든 가치가 뒤범벅이 되고 먼저 가졌던 자들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답니다.

그래두 나는 여기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하겠어요. 요만큼이라두 이루어낸 사람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으니까요. 이 초라하고 남루한 누더기 더미 속에서 보석 같은 알맹이들을 골라내어 다시 빛나는 옷으로 지어낼 테니까요.

재작년에 돌아와서 이 집과 텃밭을 당신과 내 이름으로 샀어요. 그리고 올해 구십오 년에야 수리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당신이 돌아왔을 때 우리들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을 훼손하게 될까봐 손을 대지 않았지만 너무 쇠락해 있어서 지붕이나 방을 고쳐야만 했구요 다른 데도 여러 곳 손을 보았지요.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 예전의 부엉이 우는 소리를 듣고 있어요. 저물녘의 산비둘기 울음 소리도 들었어요. 그 새들은 지금까지 살아남은 옛날의 바로 그 새들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과 하나가 되어버린 죽은 새들의 혼령들일까요?

나는 언젠가 친구를 비판하면서, 우리는 그 시대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라고 절망적으로 외쳤던 적이 있어요. 그렇지만 요새 와서 나는 이 말을 수정할 작정입니다. 지상에서 어느 때에나 사람들은 사랑을 했어요. 세상에 드러나는 모양이 시대마다 다르기는 했어요. 물살에 씻기워 닳아지고 부서지는 돌멩이처럼 일상에 시달리는 벗들을 보며서 나는 그들이 회한에 잠기지 않기를 바래요. 지금 그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풍요로운 인생의 깊이를 존중하라고. 그리고 더욱 성숙한 사랑으로 지난 날과 미래를 껴안게 될 것을 기대하구 있어요.

요즈음 몸이 좋지 않아요. 너무 과로한 것 같아요. 여름방학이 나를 구원해 주었지만 지난 학기말에는 시험 감독을 들어갔다가 하마터면 쓰러질뻔 했어요. 교탁에 붙박이처럼 오뚝 서있다가 한 발 내딛으며 창가 쪽으로 돌아서는데 갑자기 환한 빛 때문이었는지 현기증이 나면서 어찔, 하는 거예요. 간신히 창턱을 잡고 눈을 감고 잠시 서있었어요.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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