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9>방송보도의 표본을 보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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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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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동아방송 DBS” 뉴스로 첫 전파… 방송저널리즘 새 모델 선도

“여기는 동아방송 DBS입니다. 동아의 첫 뉴스를 전해드리겠습니다.”

1963년 4월 25일 오전 5시 30분 동아방송이 쏘아올린 첫 전파는 뉴스와 함께 시작했다. 동아방송 뉴스는 ‘격조 높은 민족의 방송’을 표방한 동아방송의 색깔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분야였다.

동아일보는 1963년 신년호에서 동아방송 설립의 필요성을 “정보의 정선(精選)을 위해서는 높은 경륜과 도덕적 안목을 가진 언론의 세련된 평가작업이 요구된다”고 밝혔다.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은 “동아일보의 방송화, 방송의 동아일보화에 목표를 뒀다”고 말할 정도로 동아방송은 뉴스와 정보의 올바른 전달에 뿌리를 두고 출발했다.

동아방송 뉴스는 방송계에서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당시 관영방송 KBS는 정부 기관의 발표문을 알리는 ‘관보’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MBC, CBS 등 민영방송은 뉴스보다 오락 프로그램에 치중했다.

동아방송은 개국 때부터 정시(定時) 뉴스를 하루 15회 내보내는 과감한 편성에 나섰다. MBC와 RSB(TBC의 전신)가 각각 1961년, 1964년 개국 때 하루 8회와 13회의 뉴스를 내보냈던 것에 비하면 동아방송의 뉴스는 절대적으로 많았다. 개국 1년이 채 안 된 1964년 2월 동아방송은 하루 17회로 정시 뉴스를 늘렸다.

다른 방송사는 동아방송 뉴스를 피해가는 전략을 택해야만 했다. 동아방송 뉴스가 시작한 지 11일 만에 MBC는 정시 뉴스에서 50분대의 시간전 뉴스로 바꿨다. 동아방송보다 1년 늦게 출범한 RSB는 아예 시간전 뉴스로 출발했다. 시간전 뉴스를 내보냈던 CBS는 30분대 뉴스로 전환하는 등 동아방송 뉴스가 몰고 온 연쇄반응은 엄청났다.

동아방송은 1969년 10월 ‘DBS 뉴스쇼’라는 혁신적인 뉴스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매일 아침 8∼9시 생방송된 이 프로그램에는 동아일보의 정치 경제 사회 부장, 논설위원이 돌아가며 진행자로 나서 뉴스와 전화 인터뷰, 특파원소식 등을 전했다.

‘DBS 뉴스쇼’를 기획했던 박정하 당시 뉴스부장(82)은 “원고지에 기사만 쓰던 기자를 진행자로 기용하는 것은 큰 모험이었지만 기자의 분석력을 살린 뉴스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기자가 실수라도 할까 봐 걱정했지만 금방 적응하고 매끄럽게 진행해 인기 프로그램이 됐다”고 말했다.

강현두 서울대 명예교수는 “기자들이 펜 대신 마이크를 잡은 ‘DBS 뉴스쇼’는 방송 저널리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며 “국내 앵커맨 시스템의 효시로 평가받을 만한 프로그램”이라고 말했다.

1964년 2월 등장한 ‘라디오 석간’은 ‘뉴스는 엄숙해야 한다’는 통념을 깨뜨렸다. 매일 오후 9시 방송된 ‘라디오 석간’은 한 명의 진행자가 단조롭게 뉴스를 전해주는 것에서 벗어나 남녀 진행자가 서로 주로 받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뉴스와 뉴스 사이에는 음악이 삽입됐다. 주요뉴스는 현장취재 방식으로 기자의 내레이션과 함께 배경음, 인터뷰 내용 등을 추가해 현장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라디오 석간’은 뉴스의 현장성과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동시에 살린 독특한 포맷이었다. ‘라디오 석간’이 성공을 거두자 같은 해 10월부터 동일한 포맷으로 오전 7시에 ‘라디오 조간’을 시작했다.

동아방송은 대형 사건사고를 신속하게 취재하며 ‘큰 뉴스에 강하다’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1967년 충남 구봉광산 낙반사고 때 지하에 8일간 묻혀 있던 생존 광원의 육성을 파이프를 통해 청취자에게 전달했고 1968년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에서 생포된 김신조를 단독 인터뷰했다. 1970년 서울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때는 국내 방송사 중 유일하게 전일 보도체제를 가동했다.

개국 9개월 만인 1964년 1월 동아방송은 미국 케네디우주센터의 새턴로켓 인공위성 발사 실황을 생중계했다. 최창봉 당시 방송부장(85)은 미국 위성발사 실황을 중계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말했다.

“발사 며칠 전 외신을 통해 발사 실황이 로스앤젤레스를 통해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단파로 중계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부랴부랴 주한 미국대사관에 부탁해 고성능 단파 수신기를 빌려왔죠. 미국에 이민 간 아나운서를 케네디우주센터로 급파해 중계방송에 들어갔습니다. 서울 스튜디오에서 서울대 공대 교수의 해설을 곁들여 장장 3시간 동안 발사 실황을 생중계했습니다.”

청취자들은 신속 정확한 보도에 박수를 보냈지만 정권의 실정(失政)도 서슴없이 지적하는 동아방송에 대해 정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1964년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시위가 격화되자 정부는 6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바로 다음 날 동아방송 뉴스실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최창봉 방송부장, 고재언 뉴스실장, 이윤하 편성과장, 조동화 제작과장, ‘앵무새’ 프로그램의 김영효 담당PD와 집필자였던 이종구 외신부장은 연행됐다.

매일 오후 9시 55분부터 5분간 방송한 ‘앵무새’는 부조리한 사회 현상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칼럼 프로그램이었다. 부장급 기자가 쓴 원고를 당찬 여성 성우의 목소리에 실어 내보냈다.

앵무새 사건 관련자 6명은 반공법과 특정범죄처벌에 관한 임시특별법 등의 위반혐의로 계엄보통군법회의에 구속 송치됐다. 방송 내용과 연관해 방송인들이 투옥된 것은 국내 방송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앵무새 사건은 장장 5년에 걸친 법정투쟁 끝에 1969년 7월 서울 고등법원에서 전원 무죄가 확정됐다.

당시 구속됐던 이윤하 편성과장(78)은 “표면적으로는 ‘앵무새’ 프로그램이 구속 사유였지만 사실은 뉴스를 비롯한 동아방송의 전반적인 논조가 사회 비판적 성격이 강해 정부에는 눈엣가시였다”고 말했다.

정부의 긴장관계가 계속되면서 동아방송과 동아일보 기자들은 테러와 협박에 시달렸다. 1964년 6월 공수특전단 장교들이 동아일보에 들이닥쳐 기자들에게 폭언과 협박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65년 9월 변영권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의 자택 일부가 폭파됐는가 하면 동아방송 조동화 제작과장이 괴한에게 납치돼 구타를 당하고 최창봉 방송부장에게 협박전화가 걸려 왔다. 그러나 물리적 압박에 굴하지 않고 진실만을 보도하는 동아방송의 보도정신은 더욱 굳게 자리 잡았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동아방송 뉴스는 내용적으로 형식적으로 한 시대, 아니 여러 시대를 앞서간 선구적 방송 저널리즘이었다”고 말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獨 차붐-베트남전 등 ‘세계의 현장’ 생생하게 전해 ▼
장기기획시리즈 ‘DBS 리포트’

1965년 동아방송 기자가 DBS 로고가 새겨진 취재테이프 장비를 어깨에 메고 헨리 캐벗 로지 당시 베트남 주재 미국대사를 인터뷰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65년 동아방송 기자가 DBS 로고가 새겨진 취재테이프 장비를 어깨에 메고 헨리 캐벗 로지 당시 베트남 주재 미국대사를 인터뷰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경기 시작 서너 시간 전부터 관중이 밀려들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이 기자를 보고 한국인임을 알고 ‘차붐’ ‘차붐’ 합니다. 장내 아나운서가 차범근 선수를 ‘붐근 차’라고 소개하자 스탠드에서는 큰 환성이 터져 나옵니다. 그럼 경기를 끝낸 차범근 선수의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1979년 11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유럽 프로축구 무대를 밟은 차범근 선수의 활약상이 동아방송 ‘DBS 리포트’의 전파를 탔다. 이종구 동아방송 기자는 그해 8월 독일 축구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한 차 선수를 취재하기 위해 현지로 날아갔다. 이 기자는 차 선수가 소속된 프랑크푸르트 팀과 보르시아 팀의 경기를 직접 관람하며 차 선수가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모습과 경기장을 찾은 한국 교민들의 반응을 생생하게 전했다.

동아방송의 마이크는 세계의 현장을 누볐다. ‘DBS 리포트’는 동아방송의 대표적인 해외 취재 프로그램이었다. 1963년 개국부터 1980년 폐방 때까지 18년 동안 계속된 장수 프로그램으로 초반에는 국내 심층취재에 주력하다 1976년부터 무대를 세계로 넓혔다. 매일 20분씩 30회 단위로 하나의 주제를 다루는 국내 방송 사상 보기 드문 장기기획 시리즈였다.

‘유럽 속의 한국인’ 편을 담당했던 이종구 기자는 ‘축구 대명사 독일의 차범근’ 외에 ‘오스트리아 태권도 사범’ ‘프랑스의 한국 화가’ ‘독일 광부’ 등을 취재해 1979년 11월 2∼30일 연속 방송했다. 1976∼80년 ‘DBS 리포트’가 다룬 주제만 45개였고 ‘남미아리랑’ ‘인도대륙을 가다’ ‘불타는 검은 대륙’ 등이 특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 1977년 12월 방송한 ‘아메리카 이민 80년’은 제5회 한국방송대상과 방송윤리위원회상을 동시 수상했다.

동아방송은 1960년대 후반 긴박하게 전개된 베트남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베트남에 기자를 파견했다. ‘월남현지르포’ ‘월남현지보고’ ‘월남특집 시리즈’ ‘월남소식’ ‘월남통신’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파병 국군의 전투 상황, 가족의 육성편지 등을 전했다.

1965년 베트남 취재를 갔던 박미정 당시 국방부 출입기자(76)는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취재 테이프만은 꼭 품에 안고 있었다”며 “테이프는 곧바로 도쿄특파원을 통해 서울로 전달했다”고 말했다.

이 밖에 1963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암살되자 동아방송은 추도 프로그램을 긴급 편성했으며 1965년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로디지아 독립과 흑인분규’ 프로그램을 제작해 넓은 국제적 안목을 보였다.

동아방송이 이처럼 해외 취재에 앞설 수 있었던 것은 도쿄 워싱턴 런던 등에서 활동하는 동아일보 특파원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동아방송은 1964년부터 도쿄, 부에노스아이레스, 파리 등에 자체적으로 특파원을 파견했으며 세계 각지에 20여 명의 통신원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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