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새내기 철학입문서’ 20선]<9>매트릭스로 철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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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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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와 소크라테스의 공통점은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한문화

《“내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실재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마음이란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가? 인공 지능이 가능한가? 이런 질문들은 결국 단 하나의 요구만을 남긴다. 바로 ‘깨어나라!’는 것이다.”》
1999년 워쇼스키 형제가 감독한 영화 ‘매트릭스’에서 여주인공 트리니티는 “사람을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은 질문들”이라는 대사를 던진다.

윌리엄 어윈 미국 킹스대 철학과 교수는 대학을 중퇴한 만화가 출신 괴짜 형제가 빚어낸 이 기이한 영화에서 다각도의 철학적 해석을 풀어낼 수 있음을 간파했다. 그의 요청을 받은 세계 각국의 철학자 17명이 글을 보내왔다. 가장 긴 원고를 써온 인물은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 철학과 교수인 슬라보예 지젝이었다. 어윈은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 시트콤 ‘사인필드’ 등 대중문화 콘텐츠를 화두로 철학을 논한 저술 시리즈를 기획 편집했고, 지젝은 1991년 저서 ‘삐딱하게 보기’에서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를 통해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을 설명한 전력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였던 셈이다.

어윈 교수는 서문에 “어째서 ‘매트릭스’ 같은 대중문화에 대해 글을 쓰느냐고? 그곳에 사람들이 있으니까!”라고 썼다.

“호메로스, 단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거론하며 철학적 질문을 제기하면 아무도 왈가왈부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철학이 오직 철학자의 저서에서만 발견되고 교수들의 삶에서만 의미 있다면 그만큼 지루하고 메마른 학문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은, 어디에나 있다.”

‘매트릭스’에서 선지자 모피어스가 주인공 네오에게 “매트릭스는 어디에나 있다”고 한 대사를 인용한 것이다. 어윈의 말대로 철학은 모든 사람의 삶에 연관돼 있고 그들 각각의 삶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

공동저술 2개를 포함한 15개의 글은 각각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 불교, 허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필자 각각의 관심 분야에 따라 선택한 프레임을 이용해 영화를 해석한다.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니체, 사르트르, 셀라스, 노지크, 보드리야르, 콰인 등 고금의 지성이 남긴 단서들이 종횡무진 언급된다.

첫 장을 쓴 어윈 교수는 네오를 소크라테스와 나란히 놓았다. ‘동굴’을 뛰쳐나가 ‘보다 높은 수준의 실재’로 몽매한 군중을 인도하려다 곤경에 빠진 선지자들이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하늘, 공기, 빛깔, 형태, 소리 등 외부의 모든 대상은 사람의 판단을 흐리는 꿈의 미혹에 불과할지 모른다”고 했다. 제럴드 에리온 뉴욕 미데일대 철학과 교수와 배리 스미스 뉴욕주립대 교수는 이를 인용하며 “영화 ‘매트릭스’는 삶을 ‘악령이 만든 기만’이라 보는 데카르트의 회의론을 반복했다”고 썼다.

한층 높은 곳에서 방점을 찍는 것은 지젝이다. 그는 ‘매트릭스’가 주는 충격의 근원이 가상현실이라는 주제가 아니라 매트릭스의 에너지 공급원으로 인간을 배양하는 시스템의 이미지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지젝은 “지나치게 능동적으로 세상에 개입한 인간의 죄의식에서 이런 공상이 나온 것 아닐까? 인간은 존재를 지탱하는 환상의 버팀목으로 매트릭스가 필요했던 것”이라고 했다. 철학에 관심이 있지만 라캉이나 레비스트로스의 저술을 펼쳐들 엄두가 나지 않았던 독자라면 시작점으로 삼을 만하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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