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그때 그시절엔]<18>가수 구창모 씨와 외상 술값

  • 입력 2004년 12월 5일 19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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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대학가 막걸리 집의 풍경. -동아일보 자료사진
1980년대 초반 대학가 막걸리 집의 풍경. -동아일보 자료사진
30년 전 대학 시절, 당시에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많지 않아 학생들은 늘 용돈이 궁했다. 이런저런 핑계로 술자리가 벌어지던 날, 취기가 돌면 주머니 사정은 늘 뒷전이었다. 하나 둘 탁자에 오른 술병과 안주 접시가 거둬지고 게슴츠레해진 눈으로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하는 파장 분위기가 되면 술값이 아예 없거나 모자라는 우리들과 술집 아줌마 간에 감도는 긴장감이란….

결국 선배 순으로 애지중지하던 시계를 내놓고 머리를 긁적이며 문을 나서야 했다. 그럼에도 웃음을 잃지 않던, 지금은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막걸리 집 아줌마가 그립다.

비 오는 어느 날 저녁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학교 앞에서 하숙하는 친구 집에 놀러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데 요란한 문소리와 함께 다른 친구로부터 전령이 왔다. 얘기인즉 학교 앞에 개업한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술값이 모자란다는 전갈이었다.

당시 학교에는 지방에서 온 유학생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서울 학생들에 비해 목돈(?) 동원 능력이 월등한 탓에 간혹 피해를 보기도 했다. 고향 집에서 하숙비 등 ‘향토 장학금’이 오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런 돈이 있으면 단숨에 달려가 친구들을 구할 수 있었고, 없으면 텔레비전이나 야외전축, 녹음기 등 조금이라도 값나가는 물건을 들고 술집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그날은 말일이 거의 다 된 시기여서 유학생 친구에게 돈이 없었고 하숙방에도 돈 될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난감해하는 전령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유학생 친구는 세상근심 다 짊어진 양 얼굴을 구겼다. 그러다가 그 친구는 내가 신주단지처럼 여기는 전자기타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그 친구는 놀란 토끼 같은 눈을 한 내 의사는 묻지도 않은 채 “미안테이, 집에서 ‘자금’ 올라오면 책임질 끼라 마!”라며 기타를 집어 들고 문을 나섰다.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연습’과 ‘의리’라는 단어를 되뇌이며 얼떨결에 술집까지 따라 갔다. 장물로 취급받으면 안 된다는 친구의 치밀함 때문이었다.

주점 안에 들어서니 술값 때문에 이미 심각한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주인에게 기타를 내놓으며 그 ‘신주단지’의 운명에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주인이 “개업일이어서 다른 손님들을 위해 노래를 한곡 불러주면 다음에 와서 갚도록 선처해 주겠다”며 웃는 게 아닌가.

모두 환성을 지르고 분위기는 일시에 반전됐다. 그러나 문제는 내 신주단지가 통기타가 아닌 전기기타였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그날의 ‘공연’은 내 가수 인생에서 앰프 없는 전기 기타로 노래를 끝까지 부른 불가사의한 무대로 기억된다.

지금은 학교 앞이 유명한 번화가가 됐지만 후미진 골목에 줄줄이 늘어섰던 주막집의 넉넉하고 풋풋한 정이 그립기만 하다.

○ 구창모 씨는

△1954년 생 △홍익대 전자공학과 졸업 △78년 TBC 해변 가요제 ‘구름과 나’로 데뷔 △80년 그룹 ‘송골매’ 리드보컬 △85년 ‘희나리’로 솔로 데뷔 △히트곡은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두 다 사랑하리’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등 △현재 무역업체 엠엔아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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