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중년엄마의 자아선언 "엄마도 여자란다"

입력 2000-02-14 19:31수정 2009-09-23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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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요네즈'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 그 옆에서 머릿결에 좋다며 마요네즈를 덕지덕지 바르는 어머니. 지난해 초 개봉된 한국영화 ‘마요네즈’의 한 장면이다.

엄마도 엄연히 한 인간이고 여성임을 강조한 이 영화에서 딸은 “다른 엄마들은 안그런다”며 “엄마가 역겹다”고 악을 썼다. 왜 그랬을까.

여성학자 조영미씨(단국대 강사)는 “중년 여성이 남편이나 자식이라는 가족관계에서가 아닌 독자적 정체성을 찾고 싶을 때 처음 맞닥뜨리는 것이 ‘자신도 여자’라는 성 정체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성성을 지향하는 엄마의 모습은 ‘무성(無性)적’인 모성의 이미지에 반(反)하기 때문에 다른이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다.

끊임없는 자기희생과 자기부정을 강요받는 한국의 엄마들. 이제 엄마도 ‘자신’을 찾고 싶다며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엄마도 여자고 사람이야!”

▼ '마른꽃' ▼

L씨(60·서울 서초구 서초동)는 일곱 살난 손녀로부터 “할미꽃, 전화받으세요”라는 말을 인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그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진다.

“저 어린 것 눈에도 내가 늙어 보이나 싶어. 스스로가 한심하지.”(L씨)

박완서씨는 소설 ‘마른꽃’에서 자식을 출가까지 시킨 할머니가 목욕 중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 벗은 몸으로 방에 들어섰다가 거울에 비친 몸을 보고 놀라는 모습을 통해 ‘여성’이란 눈감을 때까지 잠들지 않는 것임을 강조한다.

‘…전화를 받다 말고 나는 하마터면 ‘저 할망구가 누구야!’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배꼽 아래는 참담했다.…그때 나는 급히 바닥에 깔고 있던 타월로 추한 부분을 가리면서 죽는 날까지 그곳만은, 거울 너에게도 보이나봐라하고 다짐했다.’

지난해 출판된 ‘제3의 성, 중년여성 바로보기’에서도 중년 여성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중년에도 외모가 중요한가’에 대해 37∼57세 기혼여성 498명을 조사한 결과 361명(72.5%)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 그러나 현실은… ▼

P씨(50·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는 며칠 전 고등학생인 두 딸과의 쇼핑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분하다. 큰 맘먹고 자신의 옷을 고가 브랜드에서 골랐더니 큰 애가 “엄마, 그렇게 퍼졌는데 그 옷이 맞겠어요”하는 게 아닌가.

“애들이 나는 느낌도 없는 줄 알아요. 아빠는 사회생활을 하니까 좋은 옷 입고 골프치는 것도 당연하지만 엄마가 그러면 다 사치고 허영이래요.”

S씨(29·인천 부평동)는 몇 해 전부터 엄마(53)의 선물을 고를 땐 각별히 주의한다. 결혼기념일 선물로 파자마세트를 준비했는데 엄마가 “레이스 달린 예쁜 잠옷도 많은데…”하며 섭섭해했던 것. 그는 기어이 야한 것으로 바꾼 엄마에 대해 “빨래하기 쉽고 실용적인 걸 더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라며 고개를 갸웃한다.

엄마의 희생을 ‘담보’로 자란 젊은 여성들. 숙명여대 아세아여성문제연구소의 김영란박사(사회학)는 “일부 젊은 여성은 엄마를 자신과 다른 ‘종(種)’으로 여기며 엄마의 자아실현욕구는 더 무시하는 경우도 많다”고 지적했다. 결국 그들의 이기적 자아실현 욕구때문에 엄마들의 ‘애프터서비스’ 기간만 늘어간다는 것.

▼ 엄마, 예쁜 우리 엄마 ▼

C은행에 근무하는 K씨(38·서울 도봉구 창동)는 설 연휴가 지난 뒤 엄마(60)에게 100만원을 들여 검버섯 레이저치료를 해 드렸다.

“남들은 그 나이에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부을 필요가 있느냐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저도 화장품은 조금 무리해서라도 좋은 걸로 쓰고 싶거든요. 엄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이 피부과의 C원장은 “최근 몇 년 사이 딸과 함께 병원에서 주름 검버섯 등 미용치료를 받는 중년여성을 쉽게 볼 수 있게 됐다”며 “아무래도 딸이 편하고 잘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년 이후의 여성이 자신을 찾아가는 방편으로 ‘여성성’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여성성이 본능이건 사회에서 교육된 것이건 여성성만이 엄마의 정체성은 아니기 때문.

심리학자인 C 노웍은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가장 신경쓰는 세대는 중년기”라면서 “육체적으로 쇠퇴할수록 다른 것으로 가치를 보상받을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신체적 가치에 더 민감해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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