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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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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기에 일요일의 죽음은 참혹했다. 비무장 민중을 향한 살육이니 더욱 끔찍했다.
‘블러디 선데이(Bloody Sun-day).’ 피의 일요일.
역사는 세 번의 블러디 선데이를 기록해 놓았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된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학살, 1972년 뮌헨올림픽 ‘검은 9월단’ 테러, 그리고 같은 해 1월 30일 영국 공수부대의 북아일랜드 시위 군중에 대한 난사.
아일랜드. 바람 잘 날 없는 땅.
영국군의 북아일랜드 투입이 처음부터 배척받진 않았다. 북아일랜드의 고질적인 종교 갈등 때문에 많은 시민은 평화를 원했다. 군은 합당한 방식으로 북아일랜드를 다시 세우는 조력자가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총칼은 정치적 야욕의 수단이었다. 발톱은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북아일랜드를 손에 넣길 원한 영국. 주민들은 감시당했고 불법 억류와 차별이 벌어졌다. 평화도 시민권도 얻지 못한 북아일랜드의 절망은 커져만 갔다.
그래도 북아일랜드인은 무장 항쟁을 주장한 IRA(Irish Republican Army)보다는 평화시위에 힘을 실었다. 북아일랜드 데리에서 시민권협의회를 중심으로 비무장 행진을 벌인다. 30일 오후, 모든 시위를 불법 폭력으로 간주한 군인들의 총이 불을 뿜었다.
학살이었다. 13명이 죽고 17명이 다쳤다. 그러나 영국은 사실을 조작했다. 사망한 17세 소년을 폭탄테러범으로 위장했다. 영국정부는 IRA의 선제공격에 대한 ‘불가피한 반격’으로 청문회를 매듭짓는다.
북아일랜드는 이후 변한다. 젊은이들은 IRA로 뛰어들었다. 같은 해 7월 21일 영국 벨파스트 주둔군 폭탄 테러는 복수의 시작이었다. 30여 년 동안 쌍방간에 3200여 명이 테러로 숨졌다.
블러디 선데이는 하나같이 닮았다. 추잡한 정치와 일방적인 도륙, 그리고 은폐와 왜곡. 씻을 수 없는 상처까지….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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