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속의 오늘]1936년 '홍도야 우지마라' 초연

  • 입력 2004년 7월 22일 19시 04분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홍도야 우지 마라’는 대중 신파극의 상징이었다. 여성 수난극의 전형이자 한국형 ‘최루(催淚)극’의 원조다.

1936년 7월 23일부터 여드레 동안 동양극장에서 초연(初演)된 연극은 대성황이었다.

첫날부터 관객은 초만원이었고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한 많은 여인의 기구한 일생’은 당시 가장 중요한 관객층이었던 화류계 여성들의 심금을 울렸다. 연극의 성공은 기생들의 집단관람과 ‘입소문’에 힘입은 바 컸다고 하니.

1938년 법정에 선 홍도가 오빠의 변론으로 무죄선고를 받게 되는 후속편이 제작됐고, 그 이태 뒤에는 주제가가 만들어져 레코드가 10만장이나 팔렸다.

사람들은 왜 그리 열광했을까.

성적(性的) 야수의 소굴에 버려진 채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홍도. 그 기구함에서 나라 잃은 백성들은 무엇을 보았던가.

그러나 정작 연출을 맡았던 박진은 떨떠름했다. 처음 원고를 받아보고 “지나치게 신파조”라며 내동댕이쳤던 그다.

연극의 대성공에 낯이 화끈거렸다. “연극의 신이시여, 죄를 사하여 주소서!”

‘홍도야 우지 마라’는 유랑극단에서 임의로 지은 이름이었고, 원제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였다.

극작가 임선규는 폐결핵으로 병상에 누워 작품을 집필했다.

이름도 낯선 임선규는 일제강점기 최고 인기배우 문예봉의 남편이다. 문예봉이 누군가. 1932년 ‘임자 없는 나룻배’에서 뱃사공인 나운규의 딸로 분했던 그는 ‘3000만의 연인’이었다.

임선규는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데뷔작 ‘수풍령’이 민족주의 성향이 짙다 하여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1940년대에 이르러 부부는 친일(親日)로 돌아선다.

광복된 뒤 그는 절필하다시피 했으나 친일 행적은 멍에였다. 생존의 위협이었다.

1946년 11월 그는 ‘뜻밖에도’ 남로당 창당대회에 모습을 나타냈다. 친일의 면죄부를 받기 위해서였을까.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번엔 ‘좌익 경력’이 덫이 되었으니. 부부는 그해에 월북하고 만다.

그들의 부랑(浮浪)은 예술의 둥지를 찾기 위함이었는가, 입신을 위함이었는가.

일제와 분단, 그리고 전쟁의 격랑 속에서 그들은 부표(浮漂)처럼 떠올랐다 까무러졌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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