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641년 광해군 사망(인조실록)

  • 입력 2004년 7월 9일 20시 15분


관형향배(觀形向背)!

1618년 광해군은 명나라에 원병을 보내면서 도원수 강홍립에게 넌지시 일렀다. “정세를 잘 살펴보고 행동을 결정하라.”

후금과의 싸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라는 지시였다.

원병은 성루를 출발한 지 반년이 지나서야 압록강을 건넌다.

시늉뿐인 몇 번의 교전이 있은 뒤 강홍립은 후금의 누르하치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그대들과 원수진 일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싸우겠소.”

광해군은 이후에도 명의 줄기찬 추가 파병 요구를 물리쳤다.

그는 철저한 현실외교를 택했다.

당시 명나라는 서산에 지는 해였으나 ‘중화(中華)’의 위력은 여전했기에 구슬리며 조심스럽게 대했다. 동북아의 새 강자 후금엔 유화책을 구사했다. 두 나라에 첩자를 투입하고 수시로 사신을 보내 정보를 수집하고 전황(戰況)을 헤아렸다.

임진왜란 때 세자에 책봉돼 ‘분조(分朝)’를 이끌었던 광해군이었다. 적진을 뚫고 사지(死地)를 헤치며 의병을 도모했던 그다. ‘외세(外勢)’의 본질을 꿰뚫어보았다.

실사구시(實事求是) 외교는 그 소산이다.

그 요체는 무엇보다 ‘생존’이었다. 백성의 안위(安危)였다. ‘현실에 칼날같이 맞는 바른 논의’를 택하고자 했다.

그러나 광해군 재위 15년(1623년) 신하들이 군사쿠데타(인조반정)를 일으키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광해는 천자의 명을 두려워함이 없이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인조 정권은 ‘숭명반청(崇明反淸)’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결과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었다. 전대미문의 재난으로 나라는 쑥대밭이 되었다. 헛된 명분론의 대가였으니.

대저 그 명분이란 게 무언가. 백성을 위함이었나, 사대부를 위함이었나.

왕위에서 쫓겨난 뒤에도 18년을 더 살았던 광해군. 그는 조선의 국토가 후금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반정(反正)의 칼’에 맞아 혼군(渾君)과 폐주(廢主)의 오명을 써야 했던 광해군. 그는 유배지에서 아들과 며느리의 자결(自決)을, 또한 부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1641년 광해군이 숨을 거두자 그해 7월 10일 ‘인조실록’은 그가 귀양살이를 하며 지은 시 한 수를 실었다.

“고국의 존망(存亡)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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