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매거진]참여사회/랄프 네이더와 녹색당

  • 입력 2001년 1월 9일 19시 20분


유럽환경운동가들은 틈만 나면 미국 환경운동이 너무 무력하다고 투덜댄다.

기후협약 같은 국제환경협상에서 미국정부가 발휘하는 영향력은 람보(깡패라는 말의 은유적 표현이다)라는 애칭에 걸맞게 막강하지만 이에 맞서야 할 미국 시민사회의 힘은 너무 취약하기 때문이다.

올해 기후협약 총회에 람보로 나선 미국 협상대표는 급기야 유럽의 여성 환경운동가에게 크림파이 세례를 받고야 말았다.

미국 시민사회운동을 미성년 아동쯤으로 여기던 전세계 녹색파들에게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에게 억울하기 짝이 없는 패배를 안겨준 격이 된 네이더 변수가 그 정체다. 선거 결과를 살펴보자.

1억이 겨우 넘는 유권자가 참여한 이번 미국 대선에서 5% 이상의 득표율을 기대했던 녹색당의 네이더는 2.7%를 얻는 데 그쳤다. 고어와 부시는 각각 48%를 기록했다.

선거운동기간 내내 3~7%의 지지율을 기록했고 선거일 직전 주말의 여론조사에서도 5% 이상을 얻을 것으로 전망되었던 녹색당으로서는 실망스런 결과였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5%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문턱을 넘어선 정당은 다음 대선에서 1%당 140만 달러, 그러니까 5% 득표면 700만 달러에 달하는 연방지원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네이더 변수가 고어의 당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12월 10일 현재 재검표가 재개된 플로리다 주에서 부시의 우위는 불과 154표인 반면, 네이더가 이곳에서 얻은 표는 9만 6500표에 달한다.

네이더 자신의 주장대로 그의 지지자들 중 40%만이 민주당원이고 20%가 공화당원이라고 하더라도 고어는 거의 2만여표를 빼앗긴 셈이 된다.

그러니 선거일 직후 성난 민주당원들이 네이더를 격렬하게 비난한 것이나 개혁당의 펫 부캐넌 후보(전국 득표 1%)가 '네이더에게 비밀경호원을 붙여야 할 것'이라고 너스레를 떤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랄프 네이더는 비매품▼

이 글의 논지와 직접 관계가 없더라도 독자들의 참고를 위해 네이더 투표자들의 성향을 살펴보자. 아래 수치는 탈 많았던 출구조사 결과에서 인용한 것이다.

네이더가 평균 이상의 득표를 기록한 계층은 30세 미만 청년층(5%), 연간소득 1만5000달러 미만 빈곤층(4%), 무당파(6%), 진보성향 유권자(소위 '리버럴' 6%), 동성애자(6%), 그리고 경제성장보다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유권자(4%) 등이었다.

그런 반면에 흑인, 고졸 미만 저학력자, 유태인으로부터는 각 1%의 저조한 득표율을, 백인과 노동조합원, 인터넷 사용자들로부터는 평균적인(3%) 득표율을 기록했다.

가장 흥미진진한 쟁점은 소위 네이더 변수의 파괴력이다. 고어는 정말 네이더 때문에 떨어졌는가? 녹색당과 네이더의 명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시의 당선을 걱정한 녹색당 지지자들은 네이더 거래(Nader Trade)운동을 펼쳤다.

플로리다의 녹색당 지지자들 1400명은 승패가 이미 판가름난 다른 주의 고어 지지자들과 표를 교환하기로 서약하였다. 최후의 심판관이 돼버린 플로리다에서 녹색당은 민주당에 상당한 표를 양보한 셈이다. 박빙의 승부를 벌인 주에서만 1만5000명의 녹색당 지지자들이 네이더 거래에 참여했다.

민주당과 뉴욕타임스 등은 네이더를 훼방꾼(spoiler)이라고 비난했지만 이 정도면 네이더로서는 할만큼 한 게 아닌가 싶다. 더구나 거꾸로 뷰캐넌이 부시에게서 뺏아간 선거인단 수도 3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다면 '고어 훼방꾼'으로서의 악명 이외에 녹색당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가장 가시적인 성과는 수백만 달러의 정치자금과 수천 명의 로비스트를 동원해 미국 민주주의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대기업들의 영향력에 뚜렷한 경종을 울린 셈이다.

실제로 녹색당은 네이더를 찍어야 하는 이유 중 첫번째로 "랄프 네이더는 비매품"이라는 상징적 구호를 내걸었다. 이는 기업의 돈에 길들여져 날로 우경화하고 있는 민주당과의 격렬한 논쟁을 통해 선명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미국인들의 4분의 3이 기업의 지나친 영향력을 우려하고 있다는 지난 9월의 조사결과에서 확인되듯, 녹색당의 핵심 주장은 유권자들의 우려에 정확하게 부응한 것이었다.

녹색당이 민주당 진보파들과 저소득 계층의 새로운 집결지를 자처함으로써 민주당의 우경화에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기대도 작지 않은 성과다.

이는 여러 국제이슈에도 상당한 의미를 가지는데, 예를 들어 민주당은 초국적 기업이 주도하는 세계화에 대해 보수정당과는 차별화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내부적 압박을 받게 될 것이며, 기후협약이나 생물다양성 협약과 같은 국제적 환경외교에서도 녹색파들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이는 유럽 녹색당의 성장과정에서 좌파정당들이 겪은 변모와 유사한 것이다.

▼정치세력으로서의 시민권을 선사한 네이더▼

녹색당 선거 참여의 중요한 목적이기도 했던 운동의 성장이라는 면에서도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선거운동 책임자인 테레사 아마토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는 시애틀 운동을 진전시킬 새로운 활동가 세대를 단련시켰다. 녹색당 활동가들은 800만 달러를 모금했고 15만명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했으며 500개의 지역 녹색당 그룹과 900개의 대학 지부를 건설하고 100만명의 새로운 투표자들을 끌어들였다"

그와 더불어 4% 이상 득표한 18개 주에서 "녹색당은 100개 이상의 하원의원 선거 결과를 뒤엎을 수 있는 잠재력"을 확인했다.

선거 당일 발행된 워싱턴포스트는 네이더가 한정된 자원으로 가장 효과적인 캠페인을 펼쳤으며, 기성 정치인을 감시하고 그에 도전할 진보적 정치개혁운동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지지자들의 관심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고어를 당선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네이더를 극단주의자, 자기만족에 빠진 사람, 유권자를 오도하는 자, 위선적인 갑부 등으로 몰아붙이던 유력 언론들이 결국 진보적 정치세력의 등장 가능성이라는 의의를 평가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의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플로리다의 소동이 계속되는 와중에 발행된 녹색당의 전단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모두 끝났다. 2000년 대선의 승자는 AT&T, 보잉, 씨티그룹, 듀퐁…" 고어와 부시는? 그들 가운데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끝없는 진흙탕 싸움으로 인해 진정한 승자로 남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투표일 이틀 후에 발표된 성명 '녹색당은 건재하다'에서 녹색당은 비록 목표 득표율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생명력 있는 제3당으로 등장했으며 정치적 성장의 기반을 다졌다고 자평했다. 불과 2.7%의 득표율로 미래를 자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필자가 가장 큰 성과로 평가하는 것은 다시는 녹색당과 네이더가 사퇴를 종용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네이더와 녹색당이 소심한 지지자들의 충고와 겁에 질린 민주당의 압박에 밀려 캠페인을 포기했더라면, 설사 고어가 당선됐다 해도 미국 정치현실을 개혁할 비전은 이렇게 뚜렷이 부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녹색당의 정치적 미래도 4년 뒤로 미뤄졌을 것이다.

66세의 활동가 네이더는 시민권의 옹호자로서 싸워온 수십 년의 세월 끝에 당당한 정치세력으로서의 시민권을 녹색당에 선사한 셈이다. 득표율보다 중요했던 단 한가지 성과, 그것은 정치세력으로서의 시민권이었다.

서형원/환경연합 정책실 부장 seohw@kfe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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