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현장]시민단체 "노근리학살 인정하고 배상하라"

  • 입력 2001년 1월 15일 10시 06분


미국이 12일 노근리사건 조사보고서를 발표한 데 대해 국내 시민사회단체들이 일제히 진실을 왜곡한 조사라고 비난하고 있는 가운데 이 사건의 미국내 변호인단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내기로 하는 등 노근리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또 '노근리 미군 양민학살사건 대책위원회'는 한·미 양국 정부를 상대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고 노근리 사건을 유엔인권위에 제소하는 한편 국내 및 국제 NGO 단체들과 연대해 노근리 진실규명 공동 조사위를 구성, 미국 정부의 재조사를 촉구할 방침이다.

<노근리대책위 기자회견·피해자발언 동영상 보기>

◆미국내 변호인단◆

노근리 사건의 미국내 변호인단은 12일 미국 육군부의 조사 보고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내용"이라며 강한 분노를 표시하고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마이클 최(한국명) 변호사와 나치 배상 소송으로 유명한 로버트 스위프트, 마이클 고스 변호사(이상 미국) 등 변호인단은 "미국 육군부 보고서는 피해자들이 50년동안 줄기차게 주장해온 사건을 이제야 시인하면서도 책임을 병사와 하급 장교들에게 돌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변호인단은 ▲서면에 의한 육군장관의 공식 사과 ▲노근리 다리에 100만달러 규모의 추모비 건립 ▲사망자 1인당 50만달러의 배상금 지급 등을 요구하고 "피해자들은 요구 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미 육군과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최 변호사는 "여러 정황 증거와 증언에 의해 분명히 드러난 상부의 명령을 부인하고 배상을 거부한 것은 언어도단"이라며 미국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국제사법재판소 소송도 병행하기 위해 한국 법무부의 허가를 촉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한국전 참전 부대의 기록은 모두 있는 데도 유독 문제의 제7 기병연대 기록만 없다는 것은 관련 문서를 빼돌렸기 때문으로 볼 수 밖에 없다"며 "사건 은폐에 참여하거나 동조한 사람들을 형사 고발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근리 사망자는 245명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177명은 이미 확인이 끝났고 나머지 68명은 군 당국의 확인 절차를 거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망자 1인당 50만달러 배상 요구의 근거로 지난 1950년 당시 6만2500달러를 배상한다고 가정하고 여기에 연 8%의 이율을 적용한 것으로 최근 미 해병대 헬기가 이탈리아의 스키장에서 곤돌라 줄을 끊는 사고로 사망한 20명에게 1인당 240만달러씩 배상한 것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노근리 대책위원회◆

노근리 미군 양민학살사건 대책위원회와 인권시민단체들은 12일 클린턴 대통령이 미군의 양민 학살을 인정하지 않았고 배상문제를 언급하지 않았으며 이번 발표를 계기로 한국전쟁 당시 모든 주민피해를 은폐하려 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고심하는 정은용 노근리대책위원장

특히 노근리 미군 양민학살사건 대책위는 이날 오전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 정부가 마련하기로 한 장학금 수령을 거부하고 한·미 정부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오는 2월쯤 한미 양국에서 당시 노근리 양민학살에 관련된 미국병사와 노근리 피해자 가족, 법률전문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모의재판'을 열어 보고서에 나오지 않은 진실들을 낱낱이 밝힐 계획이다.

▶ 노근리 미군 양민학살사건 대책위원회 기자회견문

대책위는 기자회견문을 통해 "클린턴은 인원을 확인할 수 없는 무고한 한국인 피난민이 그곳(노근리)에서 죽었다는 결론을 내렸으나 노근리사건이 학살사건임을 부인하고 상부의 사격명령은 없었으며 의도적인 살상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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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근리 피해자들 반응

대책위는 "미국이 한국과 공동조사를 실시했더라면 피해 인원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미국이 공동조사를 거부한 것은 처음부터 이와같은 그들의 책임을 부인하기 위한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재조사를 촉구했다.

분통 터뜨리는 노근리학살사건 생존자

대책위는 "클린턴이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피해규모를 알지 못하는 노근리 이외 지역 피해자들을 포함해 한국전쟁 중 피해자 전체에 대한 추모비를 세운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라며 "먼저 노근리 희생자에 대한 추모비를 건립하고 다른 지역 피해자들에 대한 추모비는 피해조사를 실시한 뒤 건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책위는 "미국은 한국 정부와 함께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은 뒤 그들의 책임을 확인하고 피해자들에게 진정으로 사죄하는 손해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한국 정부는 노근리 대책단을 해체하지 말고 존속시켜 적극적인 사건 해결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대책위 정구도 대변인(46)은 "미국이 자국 군인들의 '학살'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역사를 기만한 행위"라고 비판하고 "클린턴 대통령이 제시한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위령비 건립과 추모기금 설치 등은 '노근리'를 이용해 다른 지역 양민학살사건까지 한꺼번에 덮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민사회단체◆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장대현 부대변인은 "미국은 이번 발표에서 최초로 노근리 양민 사살을 인정하긴 했지만 계획적으로 조직된 범죄였음은 인정하지 않았다"며 "조직적인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클린턴의 유감표명 발언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개탄했다.

장 부대변인은 또 "미국이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기 때문에 배상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인 것 같다"며 "미국은 조속히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제민주연대 박재석 간사도 "미국이 유감표명을 했다고 해서 확실하게 학살범죄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며 "포괄적인 유감표명이 아니라 실제적인 배상문제를 언급했어야 했다"며 실망을 금치 못했다.

박간사는 "위령비를 건립하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장학금을 주면서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 것은 미군에 의해 자행된 다른 지역의 학살의혹을 모두 덮으려는 작태"라면서 "미국은 피해자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한미군범죄 근절운동본부는 "미국의 진정한 반성과 책임없는 사과란 있을 수 없다"면서 "단순한 유감표명과 기타 조치로 노근리사건의 진실을 왜곡하고 대충 덮어버리려는 의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 단체는 "한·미 노근리사건의 합의사항은 굴욕적인 제2의 한일기본조약을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 원천적으로 무효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국대 국제관계학과 이철기 교수는 "한·미 양국관계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노근리사건이 우발적인 사건인지 아니면 상부명령에 의한 것이었는지 명확히 규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사건 조사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너무 소극적이었다"면서 "조사를 맡았던 담당자들이 모두 군인으로 구성되기 보다는 시민단체 등의 민간인이 참여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배상이나 보상이 이뤄지지 않고 장학사업 등으로 처리된 것은 잘못된 일"이라면서 "또한 노근리사건 외에 한국전쟁중 일어난 양민학살까지 명확히 규명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희정·안병률/동아닷컴기자 huib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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