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한국기업 세계를 품다]<10>필리핀 오지 주민 자립 돕는 LG상사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4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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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닫으면 실업자 될 걱정하던 그들,‘굴러온 돼지’에 웃다

《 필리핀 마닐라에서 동남쪽으로 375km, 밀림으로 뒤덮인 라푸라푸 섬. 인구 200명의 작은 어촌 산타바바라에서 만난 곤라도 발빈 씨(48)는 부인 다야나 씨(40)가 키우는 돼지를 자랑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장차 광산 채굴이 끝나 일자리가 사라져도 괜찮아요. 이제 우리에겐 돼지가 있으니까요.” 발빈 씨 부부의 집은 울창한 수풀을 헤치고 15분쯤 산을 올라야 나타난다. 집 한쪽 야자나무 잎사귀로 천장을 덮은 작은 돼지우리는 매일 아침 청소를 한 덕에 오물 하나 없이 깨끗했다. 돼지는 모두 4마리다. 암퇘지 3마리 중 한 마리가 5월에 새끼를 낳는다. 다야나 씨는 마치 복덩이를 대하듯 돼지를 보살폈다. 한 달 정도 키운 새끼돼지는 한 마리에 2000페소(약 5만 원)를 받고 팔 수 있다. 》
○ 돼지치기·국수공장이 미래 먹을거리

LG상사가 필리핀 동남쪽 라푸라푸 섬에서 운영하고 있는 구리 광산. 광산 너머로 푸른 바다가 보인다(위). 라푸라푸 섬 산타바바라 마을에 사는 다야나 발빈 씨가 LG상사가 기증한 돼지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이 돼지들은 광산 개발이 끝난 후 발빈 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자산이다.
LG상사가 필리핀 동남쪽 라푸라푸 섬에서 운영하고 있는 구리 광산. 광산 너머로 푸른 바다가 보인다(위). 라푸라푸 섬 산타바바라 마을에 사는 다야나 발빈 씨가 LG상사가 기증한 돼지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이 돼지들은 광산 개발이 끝난 후 발빈 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자산이다.
산타바바라는 배 없이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오지다. 이곳 사람들은 광산에서 일하거나 물고기를 잡고, 배로 사람을 나르고, 소규모 농사를 지으며 돈을 번다. 월 소득은 4500페소(약 11만2000원) 정도. 마닐라에서 신입사원이 받는 월급 1만 페소(약 25만 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아이들이 7명이나 있는 발빈 씨 집도 다를 바 없다. 부부는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를 낳아놓으면 저절로 자란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발빈 씨네가 돼지치기를 시작한 것은 지난해 10월이다. 2008년부터 라푸라푸 섬의 비철금속 광산을 개발하는 LG상사가 돼지 4마리를 사준 것이다. LG상사 직원들은 무게 15kg의 새끼돼지들을 해안에서 산 중턱까지 끙끙대며 메고 올라왔다.

돼지치기는 훌륭한 부업이다. 한 마리가 보통 10마리의 새끼를 낳으니 두 달쯤 뒤에 팔면 2만 페소(약 50만 원)가 생긴다. 발빈 씨 한 달 수입의 4배가 훌쩍 넘는다. 돼지 판 돈을 돼지치기를 함께하는 마을사람 6명과 나눈다 해도 큰돈이다. 다야나 씨는 “새끼돼지를 팔면 제일 먼저 예쁜 드레스를 사고 싶다”고 말했다. 다야나 씨는 결혼 후 21년간 변변한 옷 한 벌 장만하지 못했다.

LG상사가 이렇게 라푸라푸 섬 주민들의 부업을 지원하는 것은 이들의 ‘지속가능한 생존’을 위해서다. 라푸라푸 광산에 이 지역 주민 800여 명을 고용하고 있는 LG상사는 짧으면 3년, 길어도 8년이면 끝나는 광산의 수명을 고려해 미리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고 있는 것이다.

라푸라푸 광산과 가장 가까운 마을 말로바고의 벨린 코퍼 씨(44·여)도 LG상사로부터 국수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받았다. LG상사는 광산에서 일하는 코퍼 씨의 남편 등 이 마을 주민들을 위해 국수공장을 차려주기로 했다. 코퍼 씨는 이달 말 공사를 끝내고 다음 달부터 국수를 만들어 팔 계획이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어떤 국수를 어떻게 만들지 궁리하고 있다. 야자나무의 일종인 판단 잎과 해초를 넣은 ‘건강 국수’가 메뉴의 하나”라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가 대나무 잎사귀를 닮은 판단 잎을 조금 떼어 건네줬다. 구수하면서도 신선한 풀 냄새가 물씬 풍겼다.

○ 필리핀에서 가장 악명 높은 광산


라푸라푸 광산은 필리핀에서 ‘안티마이닝(광산개발 반대)’ 운동을 하는 이들의 표적이 됐던 광산이다. 환경 파괴, 공동체 붕괴, 인권 침해, 생계 피해. 라푸라푸 광산은 늘 이런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LG상사에 앞서 이곳을 개발했던 호주 광산개발 업체 라파예트가 2005년 광업용 청산가리를 몰래 바다에 흘려 물고기가 떼죽음 당했던 일 때문이다.

당시 라파예트는 필리핀 환경단체와 섬 주민들의 극심한 저항에 부닥쳤고 2007년 12월 결국 파산을 선언했다. LG상사는 고민 끝에 한국광물자원공사 및 말레이시아 기업과 함께 2008년 라푸라푸 광산 지분을 인수했다. 이들은 라푸라푸가 아직 쓸모 있는 광산이라고 판단했다. 라푸라푸 섬에는 구리가 상당량 매장돼 있다.

하지만 광산 개발에 앞서 현지 주민들의 사나운 눈초리부터 돌려놓아야 했다. 필리핀 환경운동가들은 LG상사의 광산 지분 인수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대사관 앞에서 광산개발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광산을 폐쇄할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필리핀의 안티마이닝 운동은 힘이 세다. 지금도 남부 민다나오 지역에서는 호주의 광산개발회사 엑스트라타가 60억 달러를 투입해 광산개발을 추진 중인데 환경단체의 반대 때문에 일이 전혀 진척되지 않고 있을 정도다.

조현용 LG상사 라푸라푸 법인장은 “라푸라푸 섬 주민들을 위해 연간 지출하는 돈이 LG상사가 이곳 광산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의 7∼8%에 이르는 200만 달러(약 22억 원)이지만 전혀 비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필리핀 전체에 만연한 안티마이닝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전략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LG상사가 라푸라푸 지역 내 34개 마을을 지원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티노판 마을 고등학교에는 교사 4명을 채용할 돈을 지원했고 4년제 대학인 ‘라푸라푸 커뮤니티 칼리지’ 건축을 도왔다. 태풍으로 난장판이 된 말로바고 마을엔 마을 성당을 짓는 데 40만 페소(약 1000만 원)를 보탰다. 최근에는 인근 마을 5개도 추가로 지원했다.

○ “LG상사 덕분에 딸의 꿈 무럭무럭”


라푸라푸 사람들이 LG상사의 진심을 알아주는 데는 3년도 더 걸렸다. 말로바고 마을 촌장인 레이놀드 아손션 씨는 “사람들이 광산개발을 반대하는 것은 그 효율성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LG상사가 들어온 이후 우리 마을의 수입이나 교육, 삶의 질이 훨씬 나아졌다”며 “그들 덕분에 국수공장 같은 부업을 통해 성공할 수 있는 ‘열쇠’도 얻었다”고 두둔했다.

파콜본 마을의 도밍고 니베로 씨 가족은 광산업에 미래를 걸고 있다. 아버지와 첫째 딸 도넬린 씨는 라푸라푸 광산에서 일한다. 둘째 딸 다일린 씨는 인근 도시인 레가스피의 비콜 대학에서 광산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고 있다. 비콜대는 한 학기 등록금이 5000페소(약 12만5000원)인데 LG상사는 6000페소(약 15만 원)의 장학금에 생활비로 4000페소(약 10만 원)를 준다. 다일린 씨는 “LG상사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라푸라푸 섬에 있는 커뮤니티 컬리지에 만족해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안티마이닝 운동에 대해 “지금의 광산은 안전시설을 충분히 갖추고 있어 문제될 것이 없는데 언론에서 자꾸 2005년 사고를 언급하니 여론이 나빠진다”며 “광산개발이 필리핀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깨닫도록 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내년에 졸업하는 다일린 씨는 지질학을 전공해 광석 전문가가 되는 게 꿈이다.

니베로 씨는 “한국기업 덕분에 딸의 꿈이 커졌다. 이 아이들이 나중에 마을 발전을 위해서도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 “광산이 환경 망친다” 반대시위 하던 마을… 이젠 시장이 찾아와 더 오래해달라 요청 ▼
■ 조현용 라푸라푸 법인장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땐 아예 밖에 나가지도 못했어요. 주변 사람들이 ‘봉변당한다’며 나가는 자체를 말렸습니다.”

조현용 LG상사 라푸라푸 법인장(사진)은 2008년 처음 부임했을 때의 험악한 분위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LG상사에 앞서 라푸라푸 광산을 개발했던 호주업체 라파예트의 최고경영자(CEO)가 당시 마을에 내려갔다가 뺨을 맞았다는 소문도 당시 나돌았다. 그래서 라파예트는 더욱 광산 운영에만 집중했고 지역주민들과 함께 지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와 함께.

그렇다고 해서 라파예트처럼 주민들을 대할 수는 없었다. 조 법인장은 뺨을 맞더라도 여기서 성공하려면 현지인들과의 대화와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지역 촌장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이들에게 “LG상사에 언제든 할 얘기 있으면 해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하며 마을마다 코디네이터를 지정해 그들을 회사와 주민 간 대화의 공식 창구로 삼았다.

라푸라푸 주민들은 가끔 무리한 요구를 해 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될 수 있으면 다 들어주자고 생각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마을에서는 LG전자의 휴대전화 10대를 지원해달라고 했다. 이 요청을 받은 사람은 하필이면 그 마을과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았던 이였다. 담당자는 홧김에 휴대전화 민원을 일거에 거절하려 했다.

조 법인장은 “그러면 안 된다”고 말리며 “5대라도 주라”고 지시했다. 광산이 어려워졌을 때 그들이 우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지역주민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대화의 창구가 막히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올해 초에는 그동안 광산 개발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던 라푸라푸 시장이 처음으로 광산을 찾았다. 시장은 조 법인장에게 “광산의 수명을 얼마나 더 연장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광산 운영을 좀 더 오래했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조 법인장은 “시장이 움직였다는 것은 결국 지역주민이 움직였다는 의미”라며 “이곳에서 쓴 돈이 이렇게 언젠간 우리에게 모두 돌아오지 않느냐”고 말했다.

글·사진 라푸라푸(필리핀)=김현지 기자 n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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