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영봉]수출의 역정(歷程)

  • 입력 2004년 12월 5일 18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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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70년대 이른바 ‘개발독재’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는 수출이었을 것이다. 그는 매달 수출진흥확대회의에 각부 장관, 재계 대표, 은행장, 기타 수출 유관조직의 대표 100여 명을 모아놓고 품목별 지역별 수출실적 하나하나를 챙기고 질문했다. 무역업계가 온갖 시책과 애로를 호소하면, 대통령과 모든 참석자가 메모하고 관련 부서는 다음 달 사후조치 결과를 보고했다. 연말인 이때쯤이면 상공부는 그해 수출목표를 달성하려고 불난 집 꼴이 된다. 업계에 총출동해 매일 선적을 독려하고 실적을 다그치고 출혈 수출도 강요하는 등 못살게 굴었다. 그야말로 대통령이 총사령관이 되어 온 나라가 ‘수출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연 5000만 달러, 8000만 달러를 수출하던 60년대 초 수출병정은 광원, 농부, 어부들이었다. 당시 한국은행 입행시험은 한국의 5대 수출상품을 물었는데 쌀, 텅스텐, 철광석, 생사, 한천(寒天) 따위가 정답이었을 것이다. 70년대 들어 가발, 신발, 방직공장 여직공들이 이들을 대체했다.

▷원양어업도 한몫을 했다. 일본 정부는 5년 넘은 어선의 용선(傭船)만을 허용했으므로 우리 기업은 노후한 배를 빌리면서 그 어획물 판매도 일본선주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당시의 일본인은 왜소해서 배의 침대는 160cm가 넘지 않았다. 그래서 체구가 작은 어부만 뽑혀 긴 세월 더럽고 지겹고 고달픈 선상생활을 하다가 운 나쁘면 풍랑에 휩쓸려 황천객이 됐다. 아프리카 서해안의 똑똑하고 건강한 우리 원양기지장은 사양길의 일본 원양회사가 파견한 반 푼의 약시(弱視) 직원으로부터 늘 감시를 받았다. 그는 끼니때마다 이 상전을 집으로 모셨고 빨래와 온갖 시중을 들었다.

▷금년 수출은 2500억 달러가 넘을 것 같다. 과거의 무역 첨병들은 이제 다 사라지거나 쓸데없는 존재가 됐고, 앞으로의 수출은 최첨단 시설과 고급두뇌들이 담당할 것이다. 사람들은 더 똑똑해졌지만 과거 그 시대의 지도력, 화합력과 극기정신은 없다. 지금은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수출터전을 얻는 일보다 거리를 점령한 농민, 스크린쿼터에 매달리는 영화인을 더 생각하는 때가 된 것이다.

김영봉 객원논설위원·중앙대 교수·경제학 kimyb@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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