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盧정부 반면교사 10년]<3>외교안보 정책과 한미동맹균열

  • 입력 2007년 12월 31일 02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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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했던 햇볕… 대미 자주… 국익도 명분도 다 놓쳐

부시, DJ와 회담때 “北에 의구심 갖고 있다” 선 그어

盧 “반미면 어떠냐” “北 핵개발 일리 있다”… 美 경악

北인권엔 ‘특수성’ 들어 외면… 국제사회 입지 좁혀

임동원… 이종석… 시스템 대신 실세가 정책 좌지우지



2001년 3월 7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김대중(DJ)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마주 앉았다.

미국 대선 과정에서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계승할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는 인상을 주던 김대중 정부는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자 정상회담을 서둘렀다. 부시 대통령이 외국 정상과의 첫 회담 상대로 김 대통령을 선택한 것이다. 북한 핵 문제 등 한반도 현안에 대한 양국 간 조율 필요성을 부시 대통령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회담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DJ는 정상회담이 성사되면 북한 문제와 관련해 부시 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부시 대통령에게 ‘햇볕정책’을 가르치겠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대선 후보 경선 때부터 ‘ABC(Anything But Clinton·클린턴과는 뭐든 반대로) 정책’을 공언했고 북핵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상호주의를 적용하겠다는 원칙을 천명해 온 부시 대통령은 DJ의 설득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나는 북한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부시 대통령을 설득하겠다는 DJ의 기대는 물거품이 됐고 외교가에서는 회담 결과가 ‘재앙’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당시 정상회담에 관여한 외교 소식통은 “부시 행정부 차원의 대북정책 ‘리뷰’가 채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너무 서두른 것이 오히려 화를 불렀다”며 “노벨상 수상자로서 미국 대통령도 움직일 수 있다는 DJ의 지나친 자신감도 한몫한 것 같다”고 회고했다.

○ 악화일로로 치달은 대미외교

첫 단추를 잘못 꿴 대미외교는 북한을 바라보는 양국의 근본적인 시각차 탓에 점점 꼬여 갔다.

DJ의 대북정책을 계승한 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좌파정권 10년 동안 한국 외교는 미국과 얼굴을 붉히는 일이 잦았다. 양국 인식 차(perception gap)의 근저에는 DJ가 자신의 최대 치적으로 자랑하는 햇볕정책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반미면 또 어떠냐”며 대미 자주의 기치를 올린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9월 “북한의 핵개발 주장은 여러 가지 상황에 비춰 일리 있는 측면이 있다”고 말해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를 최고 정책 목표로 삼고 있던 부시 행정부를 당혹스럽게 했다.

노 대통령이 2005년 3월 “이제는 동북아지역에서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미국은 “한미동맹에서 이탈하려 하느냐”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2005년 11월 경북 경주시에서 열린 회담은 역대 최악의 한미 정상회담으로 꼽힌다. 당시 노 대통령은 불쑥 “왜 그렇게 북한을 압박하느냐”며 따지듯이 물었고, 화가 많이 난 부시 대통령은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안보보좌관에게 “앞으로 노 대통령과 볼 일이 없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 양국 정상회담은 몇 차례 있었지만 노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통화는 1년 가까이 끊겼고 그만큼 한미관계도 경색됐다.

○ 말은 많았지만 실리는 못 챙겨

한국 외교는 좌파 정권 10년 동안 ‘말’은 많이 했지만 ‘실리’는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다.

한 외교부 당국자는 “알고 보면 미국에 내줄 건 다 내주면서도 말로만 미국을 자극한 경우가 많았다”며 “미국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면서 우리의 국익을 챙기는 협상 카드로 잘 활용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일본과 중국 등 이웃 나라들과도 더 불편해졌다. 실리를 따지기보다는 ‘할 말은 하겠다’는 명분 중심의 좌파 민족주의가 득세하면서 일본의 우파 민족주의, 중국의 중화(中華)주의와 여러 차례 파열음을 냈다.

하지만 2006년 7월과 10월에 있었던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위협이지만 제대로 따지지도 않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반론도 있다.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냉전 때 한미일 3각 공조는 유용한 비전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하고 새로운 동맹의 방향에 대해 고민한 점은 평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국제적 흐름 외면한 대북 인권외교

인류 보편의 가치에 해당하는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해 좌파 정권은 북한의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며 국제적 흐름을 외면했다.

DJ 정부는 임기 내내 탈북자 및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2002년 유럽연합(EU)이 유엔인권위원회에 대북 인권 규탄 결의안을 상정하려 하자 정부는 외교력을 총동원해 이를 보류시켰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도 2003∼2005년 연속 기권 또는 불참하다가 2006년 북한이 핵실험을 하자 인권결의안에 찬성했다. 하지만 올해는 2007 남북 정상회담 성사 이후 조성된 화해 무드를 이유로 기권해 인권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허만호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국제사회의 보편적 가치에 관한 사안에 무원칙하게 대응함으로써 한국 외교의 입지가 크게 좁아졌다”고 지적했다.

○ 특정 실세의 독주

시스템을 따르기보다는 특정 실세가 독주하면서 ‘아마추어’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임동원 씨는 DJ 정부 출범과 동시에 외교안보수석비서관→통일부 장관→국가정보원장→통일부 장관→대통령외교안보통일특보로 자리를 옮기며 외교안보정책을 쥐락펴락했다. 그가 DJ 정부 5년 동안 공직을 떠난 기간은 2001년 9월 7일부터 10일까지 단 4일이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북한만 연구했던 학자 출신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4년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과 통일부 장관을 지내며 ‘민족 공조’를 최우선시했다.

하태원 기자 triplets@donga.com

- [DJ-盧정부 반면교사 10년]〈1〉거꾸로 간 국민통합
- [DJ-盧정부 반면교사 10년]〈2〉독선이 부른 국론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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