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대한민국 과학영토… 남극 장보고기지를 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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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 헬기에서 내려다본 남극 장보고 과학기지. 여름의 끝무렵이라 바다엔 빙산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멀리 쇄빙선 아라온호 앞에 떠 있는 빙산만 해도 축구장만 한 크기다. 오가희 동아사이언스 기자 solea@donga.com
2월 12일 헬기에서 내려다본 남극 장보고 과학기지. 여름의 끝무렵이라 바다엔 빙산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멀리 쇄빙선 아라온호 앞에 떠 있는 빙산만 해도 축구장만 한 크기다. 오가희 동아사이언스 기자 solea@donga.com
헬기는 정말 타기 싫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데다, 1992년 대선 때 유세용 헬기를 탔다가 공중에서 수십 m나 ‘수직 낙하’했던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승한 채널A 카메라맨의 영상 취재를 돕기 위해 헬기는 더 높게, 더 깊숙이 빙하 위를 날았다.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옆자리에 앉은 극지연구소 이종익 박사(지질학)의 설명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헬기는 남극 장보고 과학연구기지 서쪽을 감싸고 있는 브라우닝 산(700m)을 넘어 고도 2000m까지 날아올랐다.

그래도 용기를 내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5개의 빙하가 합쳐져 만들어낸 거대한 난센 빙붕(氷棚·Ice Shelf)과 그 너머의 얼음산맥들… 이름이 뭐든, 그건 분명 빙하기의 지구 모습이었다.

김창혁 전문기자
김창혁 전문기자
거긴, 장보고 기지 주변과는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김예동 극지연구소장의 말처럼, 서쪽의 브라우닝 산과 동쪽의 멜버른 산(2700m)에 둘러싸여 테라노바 만을 바라보고 있는 장보고 기지는 정말 ‘명당’이라 할 만했다. 김 소장은 “어떻게 이런 곳이 남아 있었는지 아직도 신기할 때가 있다”고 했다. 중국은 이 지역에서 제5기지 터를 탐색했으나 결국 ‘인익스프레시블 아일랜드(Inexpressible island)’라는, 말 그대로 험지(險地) 중의 험지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2월 12일, 기지 준공식 날엔 눈바람까지 잦아들었다. 기지 뒤편의 설산(雪山)이나 테라노바 만의 해빙(海氷·sea ice)만 아니라면 이곳이 남극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였다. 비록 빙퇴석이긴 하지만 육지가 더 많이 드러나 있고, 갯바위엔 파도가 치고 있었다. 그런 야트막한 기슭에 마치 우주선을 닮은 듯한 기지가 들어서 있었다.

남위 60도 이남(以南)을 남극지역이라고 한다. 칠레 남단 쪽에 가까운 킹조지 섬의 세종기지는 남위 62도 13분. 주변에 세계 각국의 기지들이 몰려 있어 언젠가 내셔널지오그래픽이 “남극의 뉴욕 맨해튼 거리”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이미 ‘문명화’한 곳이다. 그 반대편, 세종기지와 4500km나 떨어져 있고, 뉴질랜드 및 호주와 더 가까운 로스 해(海) 테라노바 만(灣)의 장보고 기지는 남위 74도 37분. 건너편에 이탈리아 하계 기지와 독일 캠프, 그리고 350km 떨어진 곳에 미국 맥머도 기지와 뉴질랜드 스콧 기지가 있지만 아직은 ‘원시의 땅’이다.

장보고는 남극지역 전체로 치면 대한민국의 두 번째 기지이지만, ‘대륙에 세워진 최초 기지’라고 부르는 이면엔 그런 입지적 특징도 있다.  

▼ 해발 2700m 雪山에 둘러싸인 해안지대 “남극의 명당” ▼
얼음바다를 밀어내고 쪼개며 뉴질랜드서 3691km 달려 도착
세종기지 위치한 킹조지섬이 남극의 맨해튼이라면, 장보고 주변은 빙하기 그대로

얼음으로 뒤덮인 장보고 기지 앞바다. 남극영웅 로버트 팰컨 스콧의 탐험선 이름을 따 테라노바 만이라고 불린다. 작년 12월 모습. 한국극지연구진흥회 임완호 다큐PD 촬영
얼음으로 뒤덮인 장보고 기지 앞바다. 남극영웅 로버트 팰컨 스콧의 탐험선 이름을 따 테라노바 만이라고 불린다. 작년 12월 모습. 한국극지연구진흥회 임완호 다큐PD 촬영
리틀턴 항구

뉴질랜드 남섬의 크라이스트처치에 도착해 리틀턴 항에 정박 중인 쇄빙선 아라온호에 승선한 게 1월 28일.

리틀턴 항은 남극탐험사에서 ‘영웅의 시대’를 꽃피운 영국 해군 대령 로버트 팰컨 스콧이 1912년 탐험선 ‘테라노바’ 호를 띄운 바로 그 항구. 장보고 기지 앞바다는 그 배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크라이스트처치에 머무는 동안 스콧의 ‘남극일기’를 읽었다. 노르웨이의 아문센에게 ‘최초의 남극점 정복’이라는 기록은 빼앗겼지만, 또 귀환 길에 모두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가 보여준 과학적 열정과 인간적 존엄성은 새삼 옷깃을 여미게 했다. 스콧 일행은 강풍과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극한의 추위, 그리고 식량 및 연료부족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도 14kg이나 되는 지질학 표본을 버리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고통을 끝내는 수단’으로 진정제와 모르핀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연스럽게 죽기로 결정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죽음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죽는 것이다.” 그런 스콧의 길을 따라 남극을 간다고 하니 은연중 비장함마저 솟아올랐다.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로 추락하던 그 무렵, 이들은 지구상 마지막 미지(未知)의 대륙을 탐험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심사(心思)는 한층 복잡해졌다.

1993해리(海里)

1월 30일, 아라온호는 만 하루가 걸리는 주유를 마치고 닻을 올렸다. 설날인 31일엔 남위 50도의 바다로 접어들었다.

뱃사람들은 남위 50도의 바다를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바다(roaring sea)’라고 하고, 남위 60도를 ‘비명의 바다(screaming sea)’라고 한다. 헛소리가 아니었다. 바다는 밤새 으르렁거렸다. 잠을 청하려고 했으나 파도가 뱃전을 때릴 때마다 “쾅, 쾅”하며 마치 바위에라도 부딪히는 듯한 굉음이 났다. 선장이 있는 브리지(선교·船橋)로 올라갔다. 수면에서 16m 높이에 있는 브리지 정면 창문까지 파도가 덮쳤고, 남위 60도를 넘어서자 바닷물을 닦아내는 와이퍼에 얼음이 끼기 시작했다.

백야(白夜)도 시작됐다.

항해 6일째인 2월 4일, 처음으로 유빙이 나타났다. 길이가 한 1km쯤 될까. 아니 더 될까? 북극해에서는 볼 수 없고 남극바다에서만 발견되는 거대한 팬케이크 형태의 빙산이었다.

2월 6일 오후 3시경(현지시간). 갑판이 소란스러워졌다. 해수면은 온통 바둑판 모양으로 갈라진 얼음바다였다. 배는 그런 얼음바다를 평균 시속 12노트(약 22km)의 속도로 거침없이 헤쳐 나가고 있었다. 때로는 밀어내고, 때로는 부수면서….

배가 속력을 내면 앞머리가 얼음판 위를 올라타게 되고, 그러면 두께 1∼2m 정도의 얼음판은 배의 무게에 눌려 갈라진다. 배가 그 상태로 전진하면 고물 밑바닥에 붙어있는 아이스 나이프(ice knife)가 빙판을 쪼개 좌우로 밀어내는 식이다. “예쁜 아가씨가 얼음만 보면 돌변한다.” 물론 ‘예쁜 아가씨’는 아라온호다. 브리지에서 갑판 위를 내려다보던 김봉욱 선장이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멀리 남극대륙의 실루엣이 잡히기 시작했다.

오후 11시경. 드디어 장보고 기지 앞 바다에 도착했다. 리틀턴 항에서 정확히 1993해리(nautical mile), 3691km를 달려왔다.
장보고 과학연구기지

“315도, 320도…. 11시 방향, 10시 방향….”

선장의 지시에 따라 항해사는 배의 방향을 조심스럽게 조종했다. 기지 앞 바다엔 축구장 보다 더 큰 빙판과 집채만 한 빙산이 진행방향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라온호는 DP(Dynamic Positioning) 시스템이라는 자동위치제어 장치를 갖추고 있어, 제자리에서 360도를 회전할 수 있고 닻 없이도 ‘현 위치’를 유지할 수 있다. 빙판까지 떠 있는 좁은 만(灣) 안에서 이리저리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DP시스템 덕분이다. 극지연구소 신민철 인프라운영 부장은 “이런 장비를 갖춘 배는 전 세계에서 2, 3척뿐”이라며 “그래서 아라온호에 타려는 외국 과학자들이 늘고 있다”고 했다.  

▼ “극지연구 중심국가… 한국 3년뒤 위상 확 달라질것” ▼
“한국이 그동안 보여준게 있잖아”… 남극연구 톱10, 외국이 더 알아줘
아라온 떠나면 8개월 외부와 차단… 배 들어올때만 와이파이 터져
가족과 문자라도 하려고 우르르


쇄빙선 아라온호가 장보고 기지 앞 얼음바다에 도착하자 남극의 아델리펭귄들이 마치 환영이라도 하는 듯 나타났다. 지난해 12월 아라온호가 기지 건설 인력을 싣고 갔을 때의 모습이다. 임완호 다큐PD 촬영
쇄빙선 아라온호가 장보고 기지 앞 얼음바다에 도착하자 남극의 아델리펭귄들이 마치 환영이라도 하는 듯 나타났다. 지난해 12월 아라온호가 기지 건설 인력을 싣고 갔을 때의 모습이다. 임완호 다큐PD 촬영
“그대로 10미터만 더!” 선장의 마지막 지시와 함께 배는 멈췄다. 망원경으로 임시 부두를 내려다보니 기지 건설 근로자들이 둘씩, 셋씩 모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아무리 백야라지만 이 시간까지 일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게 아니었다. 혹시 아라온호에 가까이 가면 와이파이가 잡힐까 싶어 삼삼오오 모여든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 혹은 여자친구에게 문자라도 보낼 수 있을까 싶어서….

멀리서 본 기지는 아직도 어수선하고, 황량하기만 했다. 취재를 계획하면서 품었던 의문이 되살아났다. ‘우리에게 남극은 어떤 땅인가?’

장보고 기지 건설로 한국은 남극 대륙에서 2개 이상의 상주기지를 보유한 10번째 국가로 도약했다. 어찌 보면 우리 경제규모에 맞는 역할분담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1988년 준공된 세종기지가 남극 최북단에 있어 선진 극지국가들과의 공동연구에서 지리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라, 대륙의 심장부로 나아가기 위한 전진기지가 절실하다.

그래도 뭔가 손에 잡히는 설명을 듣고 싶었다.
남극이라는 ‘명품백’

아라온호의 승무원들이 사용하는 사관식당에서 진동민 월동대장과 와인을 나눴다. 그는 장보고 기지의 첫 월동대장. 극지연구소에선 ‘월동’을 해봤느냐가 중요한 관록이다. 일종의 ‘별’이다. 그는 2002년 세종기지 제15차 월동대원이었다. 이젠 과학자에서 중장비기사까지 합쳐 14명의 대원들과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

―세종 기지 월동과는 많이 다를 텐데….

“세종 기지는 위도(62도)가 낮아 백야도 완전한 백야가 아니고, 극야(極夜)도 완전한 극야가 아닙니다. 좀 깜깜해지는 정도죠. 하지만 장보고는 백야가 100일, 흑야가 95일입니다. 접근성도 다릅니다. 세종기지엔 비상상황이 아니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칠레나 아르헨티나 비행기가 뜹니다. 하지만 장보고는 3월 초에 아라온이 가고 나면 인근 이탈리아 기지의 해빙활주로가 열리는 11월까지는 외부와 접촉할 방법이 없습니다.”

―극도로 폐쇄된 환경이라 대원 관리도 어려울 것 같다.

“트러블이 없을 순 없습니다. 초기에 바쁜 때가 지나면 ‘수놈들의 자리매김’ 다툼이 벌어집니다. 이번에 경험 있는 대원들을 뽑으려고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웃으며) 카카오톡이 좋더군요. 대원들이 확정된 이후 카톡방을 만들어 서로 소식을 주고받았습니다. 제주에 있는 대원들은 제가 직접 찾아가 만났고….”

―단도직입으로, 장보고 기지 건설의 의미는 뭔가.

“이제 우리는 남극의 주변국가에서 ‘중심 국가’가 됐다고 봅니다. 배도 있고, 기지도 있습니다. 연구만 남았습니다. 이런 추세로만 가면 3년 뒤엔 확 달라져 있을 겁니다.”

―그래도 확 와 닿지는 않는다.

“단기적 국익으로 바로 계량화해서 보여주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과학은 결국 국익으로 이어집니다. 예컨대 우리가 작년 5월 북극이사회의 정식 옵서버 자격을 획득할 때를 생각해보면 특히 그렇습니다. 외교부 관계자들은 ‘혹시 중국 일본은 되고 한국은 탈락하는 것 아닌가’하고 긴장했지만 우리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을 만나보면 ‘당신들은 당연히 들어와야 한다. 남극에서 보여준 활동이 있잖아?’라고 했습니다.”

서울을 출발하기 전, 기지건설 준비위원을 맡고 있는 정호성 박사가 이런 말을 했다. ‘Science is umbrella(과학은 우산이다).’ 과학의 우산 아래엔 많은 것이 숨어 있다는 말이었다. 과학을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재단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각국이 남극의 ‘과학영토’ 확장에 매달리는 속뜻도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나중에 합석한 극지연구소 윤숙영 박사(지구과학)가 툭 하고 한마디 던졌다. “그런데, 우리도 이제 장보고 같은 근사한 명품백을 하나쯤 가질 때도 되지 않았나요?”

30대 여성 연구원의 그 말은 솔직히 약간 충격이었다. 왜 국익과 자원개발만 따지느냐, 우리도 이제 남극이라는 ‘인류 공통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장보고 기지 같은 ‘명품백’을 하나쯤 갖고 있을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반문이었다. 신선하고, 또 근사한 비유였다.  

▼ 남극의 선물… 100만년 비밀 담긴 얼음으로 온더록 한잔 ▼
3000m속 얼음시추가 연구 핵심… 장보고, 최종 3단계의 베이스캠프
얼음활주로 쓰는 외국기지와 달리… 장보고 지척엔 암반활주로 터
美-中에도 도움 줄 허브기지 기대

두께 2∼2.5m가량의 얼음을 깨면서 화물선을 인도하고 있는 아라온호(왼쪽). 장보고 기지 건설 자재와 장비를 옮기기 위해 아라온호는 무려 6.5km나 이런 얼음바다를 헤쳐나가야 했다. 임완호 다큐PD 촬영
두께 2∼2.5m가량의 얼음을 깨면서 화물선을 인도하고 있는 아라온호(왼쪽). 장보고 기지 건설 자재와 장비를 옮기기 위해 아라온호는 무려 6.5km나 이런 얼음바다를 헤쳐나가야 했다. 임완호 다큐PD 촬영
아라온호 승선까지 포함해 남극에 머무는 2주일 동안 가장 ‘호사’를 누렸던 순간은, 바로 위스키에 남극얼음을 채워 마시던 때였다. 언젠가 일본에서 ‘위스키 온더록(on the rock)’용 얼음을 놓고 ‘북극 얼음이냐, 남극 얼음이냐’ 하는 판촉 전쟁이 벌어졌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그렇지 않아도 호기심을 품고 있던 터였다.

물론 극지연구 선진국들처럼 빙원(氷原·ice sheet)을 시추해 2000∼3000m 아래 얼음을 채취한 건 아니다. 만약 그런 얼음으로 위스키를 마셨다면 ‘세계적인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혓바닥처럼 바다로 뻗어나간 아이스 텅(ice tongue)에서 캐낸 얼음이라곤 해도, 남극 얼음은 예사롭지 않았다. 유리잔을 귀에 갖다대니 얼음이 녹으면서 기포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탁, 탁’하고 짧게….

이 기포가 바로 지구 기후변화의 표지자(marker) 역할을 한다. 최근 100만 년 동안의 기후변화를 추적하는 가장 정밀한 자료는 남북극 얼음, 특히 남극 얼음에서 얻는다. 그중에서도 로버트 팰컨 스콧이 탐험했고, 장보고 기지와 가까운 동남극의 얼음은 약 100만 년에 걸쳐 형성된 것이다. 북극 그린란드 얼음의 나이는 약 11만 년 정도.

김예동 극지연구소장은 “선진국들이 남극 얼음 속의 공기로 지난 65만 년간의 기후를 분석한 결과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평균 180∼220ppm이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400ppm”이라고 말했다. 세계 각국이 비용을 마다하지 않고 남극대륙 얼음시추에 열을 올리는 이유도 바로, 가장 오랜 기간의 기후변화 기록을 얻기 위해서이고, 이게 바로 최신 남극 연구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남극대륙 심부(core)의 얼음 시추는 두께가 최소 3000m 이상인 빙원에서 한다. 그런 심부는 통상 해안에서 1000km 이상 떨어진 내륙에 있다. 정부가 장보고 기지 준공과 함께 내륙의 제3기지 건설 준비에 착수한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장보고 기지는 3단계로 이뤄진 극지종합계획의 2단계에 불과하다. 3단계 등정을 위한 전진기지요, 베이스캠프다.

하지만 ‘정상 정복’은 지난한 일이다. 우선 장보고 기지가 있는 테라노바 만 연안은 북빅토리아랜드 동쪽 해안가다. 서쪽으로는 남극종단산맥을 접하고 있어 가파른 경사를 따라 올라가야 동남극 빙원에 다다른다. 제3기지 건설에 앞서 등판 경사가 완만하고, 크레바스가 적은 지역을 따라 빙원에 도달하는, 이른바 ‘코리안 루트’ 개발을 선행해야 한다.

동시에 비행기 활주로가 있어야 한다. 기가 막히게도 장보고 기지 바로 뒤편,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에 길이 1.8km 폭 70m의 육상(암반) 활주로 터가 있다.

남극에선 대부분 얼음활주로를 쓴다. 상주기지로 여름엔 평균 1200명이 머무르는 인근의 맥머도 기지(미국)도, 하계에만 운용하는 마리오 추켈리 기지(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한국해양연맹 부총재이자 장보고 기지 부두 공사를 맡은 남경토건의 이동화 대표는 “장보고 기지가 ‘명당’인 이유 중 하나는 대륙에서 유일하게 암반 활주로 터를 지척에 두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보고 기지의 첫 월동대원들. 15명의 대원들은 혹한과 극야를 이기며 12월까지 월동생활을 해야 한다.
장보고 기지의 첫 월동대원들. 15명의 대원들은 혹한과 극야를 이기며 12월까지 월동생활을 해야 한다.
작년 말 항공망 구축 5개년 계획안을 입안한 극지연구소 대륙기지사업단의 정호성 책임연구원은 “(활주로가 완성되면) 현재 여름 두 달로 제한된 하계 연구기간이 130일로 늘어날 뿐 아니라 장보고 기지가 빅토리아랜드 및 로스 해 연안 각국 기지들의 허브 역할까지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남극 선진국을 따라잡고, 국가 위상을 높이는데 ‘암반 활주로’만 한 카드가 없다는 것이다.

각국의 공군기 외에 남극 상업항공사로는 가장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ALE사는 최근 “활주로가 확보되면 일류신Ⅱ-76을 띄우고 싶다”는 의향을 보이기도 했다. 일류신은 미군 수송기로 많이 사용되는 허큘리스보다 수송능력이 3배나 되는 대형제트기다.

사실 암반 활주로 건설 구상은 우리보다 이탈리아가 앞서 있다.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공동으로 내륙기지를 보유하고 있는 남극선진국. 하계 전진캠프로 쓰고 있는 마리오 추켈리 기지는 장보고 기지에서 8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입지 여건이 비슷하다. 그래서 추켈리 기지 부근에 해빙(海氷) 활주로를 만들어 쓰면서도 암반활주로 건설을 준비해왔다. 남극이사회격인 남극조약협의당사국회의(ATCM)에 의향서까지 제출해놓은 상태다. 동시에 뉴질랜드에 항공기 투입 협력을 제안해 놓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찜’만 해놨을 뿐 아직까지 구체적인 실행계획은 내놓진 못하고 있다.

장보고 기지 준공식 참석을 마치고 웰링턴을 방문한 강창희 국회의장에게 뉴질랜드의 카터 국회의장이 “뉴질랜드와 남극을 오갈 수 있도록 장보고 기지 부근에 제2의 활주로를 건설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뉴질랜드가 왜 이탈리아가 아닌 우리에게 이런 협력제안을 하는 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추켈리 기지는 하계에만 운영하는 기지라 안정적인 파트너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보고라는) 상주기지를 갖게 됐을 뿐 아니라 마인드가 비슷한 한국이 활주로를 구축하면 그들의 북빅토리아랜드 진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아시다시피, 뉴질랜드는 북빅토리아랜드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나라거든요. 우리도 좋습니다. 뉴질랜드 공군기 운항을 비롯한 지원협력을 이끌어내는 한편 이 지역에서의 연구 활동 주도권도 쥘 수 있습니다.”(극지연구소 관계자)

미국 역시 장보고 활주로가 건설될 경우 맥머도 기지의 비상활주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중국도 ‘인익스프레서블 아일랜드’에 제5기지를 구축하면 항공수송은 장보고 활주로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변수가 없지는 않다. 박근혜 정부 들어 북극해 개발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제2 아라온호’ 건조가 시급한 상황인데, 그동안의 예산 배정 관행을 볼 때 국회가 과연 ‘배와 활주로’를 모두 지원해주겠느냐는 의구심이다.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찍으면 지난 커버스토리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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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온호 건조 비용이 대략 1000억 원, 장보고 기지 비용 역시 1000억 원을 조금 넘는다. 5년 프로젝트인 활주로 건설 예상 비용은 500억 원가량.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천이 월미도와 인근 차이나타운의 관광활성화를 꾀하겠다며 2010년부터 ‘월미은하레일’ 건설에 들인 공사비만 850억 원이었다. ‘대표적인 예산낭비 사업’이라는 비난과 부실공사 시비 끝에 최근 레일바이크로 재활용한다는 발표가 있었지만, 기존 레일 철거에만 250억 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런 ‘뻘짓’에 1000억 원이 넘는 돈을 쓰면서 꼭 필요한 활주로 하나 못 만든다는 말인가!

장보고 기지=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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