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뷰티/이상곤 박사의 맛있는 동의보감 이야기]<3>바나나를 닮은 열매 ‘어름’의 효능

  • 동아일보

귀에 열 내려 이명·난청 치료


1970년대 초 시골 초등학교 시절, 특별한 간식거리가 없던 우리에게 꿈의 과일이 있다면 단연 바나나였다.

어느 봄날, 바나나가 인근 마을 뒷산에도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몇 개의 산봉우리를 넘어 그곳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소문의 바나나 나무 앞에 선 순간 얼어붙었다. 정작 그 자리엔 바나나를 닮은 으름열매 나무만 덩그러니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으름열매는 없고 보라색 으름꽃만이 눈이 시리도록 피어 있었다. 밤늦게 돌아온 소년을 기다리는 것은 부모님의 호된 꾸중뿐이었다.

여름에 열리는 으름열매는 다 익기 전에는 바나나 모양을 닮았고 다 익어 벌어지면 전복을 닮아 옛날에는 ‘임하부인(林下夫人·숲속의 여인)’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제주도엔 ‘어릴 때는 수컷이고 나이 들어 암컷인 과일=으름열매’라는 우스개 수수께끼도 있다. 으름열매는 산후 유즙이 나오지 않는 임산부에게 도움이 됐고 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 방광염에도 특효처방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가 문제의 과일을 언급한 이유는 전공인 이명(耳鳴)의 치료에 으름이 중요한 약재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명은 한자 그대로 ‘귀의 울음’이다. 조상들이 이명을 ‘귀소리’가 아닌 ‘귀울음’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질환이 마음의 고통에서 유래됐다고 본 때문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명은 귀가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를 의미한다. 스트레스가 생기면 교감신경계가 흥분하고 우리 몸은 긴장한다. 싸울 때 주먹을 움켜쥐듯 말초혈관은 좁아지고 말초에 있던 혈류가 심장으로 회귀한다. 늘어난 혈류의 방출에 부담을 느낀 심장의 박동수가 빨라져 열을 받으면서 위로 열이 뻗치는 상태가 된다.

귀는 한의학적으로 겨울을 상징하며 차가워야 건강하다. 불에 손을 데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귓불을 만지는 것도 귀의 찬 성질 때문. 차가워야 정상인 귀가 열을 받아 병이 생긴 상태가 한의학적 이명의 실체다. 따라서 한의학에선 심장에 넘쳐난 혈류를 내리고 귓속을 맑게 하면 이명이 치료된다고 본다.

중국의 유명한 약물학 서적인 ‘본경소증’엔 으름덩굴의 약효를 ‘청각을 밝게 해주고 건망증을 없앤다’고 기록했다. 이런 사유의 근거는 으름덩굴의 생태학적 특성과 관련이 깊다. 으름덩굴의 한약명은 목통(木通)으로, 실제 줄기의 목질부에는 구멍이 시원하게 뚫려 막힌 혈맥을 뚫어주는 소통력을 상징한다.

요즘 MP3나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음악자극으로 인한 이명이나 소음성난청 환자가 크게 늘고 있다. 이 병의 원인도 외부 소리에 반응하기 위해 귓속 동맥의 혈류가 늘면서 막혀 청각세포가 손상돼 생긴다는 점을 감안하면 으름덩굴의 효능이 희망을 준다. 으름덩굴은 소중한 산채(山菜)이자 이명, 난청에 도움이 되는 몇 안 되는 민간 처방이다. 이즈음 봄에 돋아난 어린잎이나 줄기를 나물로 무쳐 먹거나 국에 넣어 먹으면 귀가 밝아진다. 말려 두었다 차로 마셔도 좋다. 혈압을 내려주는 것은 덤이다.

이상곤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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