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착각… 같은 길인데 왜 달리 느껴질까

  • 입력 2006년 2월 17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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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맨체스터 옥스퍼드 거리(왼쪽)와 포트메이리언의 한 골목길. 맨체스터대 학생들은 단조로운 맨체스터에서보다 아기자기한 포트메이리언에서 거리를 2배가량 더 길게 판단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 제공 맨체스터대
영국 맨체스터 옥스퍼드 거리(왼쪽)와 포트메이리언의 한 골목길. 맨체스터대 학생들은 단조로운 맨체스터에서보다 아기자기한 포트메이리언에서 거리를 2배가량 더 길게 판단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 제공 맨체스터대
#사례1.

지하철역에서 1km 거리에 있는 오피스텔로 이사 온 K 씨의 첫 출근길. 아침에 머릿속에 그렸던 길을 거쳐 역에 도착한다. 저녁 퇴근길에 K 씨는 지하철역에 내려 같은 길로 집에 돌아온다. 이때 문득 드는 생각. ‘똑같은 길인데 왜 길게 느껴질까.’

#사례2.

모처럼 휴일을 맞아 인사동에서 여자친구와 데이트 약속을 잡은 L 씨.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가니 평소에 보지 못했던 전통 찻집이나 공예점이 눈에 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L 씨는 ‘골목 어귀에서 500m 거리라는데 더 먼 거 아냐?’라고 생각한다.

○ 대학 1학년보다 3학년이 같은 길을 더 길다고 판단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같은 길이 길거나 짧다고 느끼는 걸까. 최근 어떤 길이든 자주 다닐수록 그 길의 거리를 점점 더 길게 생각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영국 맨체스터대 환경개발학부 앤드루 크롬프턴 박사팀이 이 대학의 학생 140명에게 평소에 다니던 똑같은 길을 걸어 본 후 거리를 추정하라고 요청한 결과 같은 거리를 1학년생보다 3학년생이 더 길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연구 성과는 환경심리학 분야 국제저널 ‘환경과 행동’ 최신호에 실렸다.

연구팀은 학생들에게 대학의 학생회관에서 옥스퍼드 거리의 친숙한 여러 건물까지 직선 거리를 도보로 가늠해 보게 했다. 2개월간 학교에 다닌 1학년생은 1마일(약 1.6km)의 길을 평균 1.24마일이라고 추정하고 26개월간 다닌 3학년생은 평균 1.45마일로 과대 평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맨체스터대 학생들은 길이가 같은 길이라도 시내 방향이냐, 외곽 방향이냐에 따라 길이가 다르다고 판단했다. 학년에 관계없이 시내 방향의 길을 외곽 방향의 길보다 더 짧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들이 주로 외곽 방향의 길을 통해 등하교하기 때문이라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 광화문 대로변보다 인사동 골목이 길게 느껴져

왜 자주 다닌 길이 더 길게 느껴질까. 크롬프턴 박사는 “여러 번 다닐수록 길에 있는 세부 모습을 알아채기 시작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서 거리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초행길에 미처 못 봤던 특이한 나무나 이색 간판, 멋진 건물 등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눈에 들어오고 이 효과가 거리를 추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똑같은 거리라도 광화문의 단조로운 길보다 인사동의 아기자기한 골목이 더 길게 느껴지는 것도 동일한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크롬프턴 박사팀은 학생들을 맨체스터와 다른 풍경을 가진 노스웨일스의 이탈리아식 마을 포트메이리언으로 데리고 가 비슷한 실험을 했다. 이곳은 조그맣고 다채로운 이국적 건물들이 많은 게 특징이다.

실험 결과 학생들은 포트메이리언에서 실제 길이가 500m인 길을 평균 3배나 더 길다고 느낀 것으로 드러났다. 동일한 학생들이 평범한 도시인 맨체스터에서 500m의 길을 실제보다 1.6배가량 길다고 판단한 것과 비교되는 결과다.

연세대 심리학과 감기택 연구교수는 “걸어 다니는 길 중간에 눈에 띄는 건물이 많으면 그 길이 실제보다 길다고 생각하는 심리적 효과가 나타난다”며 “파란만장한 사건이 많았던 시기가 실제보다 긴 시간처럼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고 말했다.

○ 복잡한 장소가 단순한 곳보다 넓어 보여

연구팀의 결과는 건축가나 도시설계자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 세밀하거나 불규칙적인 특징이 있는 건물이나 도시가 단순한 경관보다 더 넓게 느껴진다는 아이디어를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크롬프턴 박사는 “이는 무에서 공간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복잡한 건물이나 장소가 단순한 곳보다 공간이 더 넓어 보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 텅 빈 들판 사진에 나무나 탑을 집어넣으면 똑같은 공간이 넓게 느껴진다.

길이도 마찬가지 경향을 보인다. 6개의 교차로를 지나는 도시여행이 2개의 교차로를 지날 때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게 한 예다. 또 길은 모퉁이가 많거나 경사질수록 복잡해져 더 길다고 생각된다.


이충환 동아사이언스 기자 cosm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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