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사태가 남긴 과학계 과제

  • 입력 2006년 1월 12일 03시 00분


《황우석(黃禹錫) 서울대 석좌교수 연구팀의 줄기세포 논문이 모두 조작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과학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과학의 기본인 ‘정직성’이 결여된 연구 성과가 발표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국민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었지만 이번 사태가 우리 과학계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만든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기초연구 실용화의 잘못된 인식=황 교수팀은 2004년 ‘사이언스’에 인간 복제배아 줄기세포 논문을 발표하면서부터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문제는 사이언스가 주로 기초과학의 연구 성과를 소개하는 저널인데도 국내에서는 황 교수팀의 논문이 당장 난치병 치료에 응용될 수 있는 것처럼 인식됐다는 것.

김선영(金善榮)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사이언스, 네이처, 셀 등 세계 최고의 저널에 논문이 실렸다 해도 실용화는 전혀 다른 문제”라며 “관련 논문 100편이 실린다 해도 신약 하나가 나오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련 학회나 단체가 중심이 돼 과학자들이 일반인들에게 ‘기초연구 논문=실용화’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 주지 않도록 자정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명품주의’에 매몰돼 편향된 논문 작성=황 교수팀의 연구 성과가 2004년과 2005년 사이언스에 연거푸 표지논문으로 장식되자 과학자는 물론 일반인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이언스는 과학자라면 평생 한 번 논문을 싣는 것이 영광일 정도로 특급 저널이다.

김 교수는 “국내에는 특급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면 무조건 좋다는 ‘명품주의’가 만연돼 있다”며 “전공 분야별로 다양한 저널이 있지만 연구비 등을 지원받기 위해 유독 대중의 인지도가 높은 저널 한두 편에 집착하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연구비 지원을 심사할 때 분야별로 고유한 저널을 제대로 평가해 주고 특허 출원 건수 등 다양한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사소한 조작은 용인되는 분위기=이번 황 교수팀의 사례처럼 엄청난 정도는 아니지만 ‘대세에 지장이 없는’ 사소한 데이터 조작이 용인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자연계열의 B 교수는 “석사과정 시절 함께 연구하던 선배가 졸업이 임박하자 내 데이터를 약간 변형해 박사논문에 게재했다”며 “다행히 학계에 발표되지 않고 졸업논문에서 표현되는 데 그쳤지만 씁쓸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도교수는 물론 선배까지도 남의 데이터를 약간씩 고쳐 내는 것은 일종의 관행이었다”며 “이런 관행을 계속 거부하지 못하면 결국 ‘이왕 할 거면 크게 하자’는 극단적인 생각으로 치달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험실의 비민주성=B 교수는 선배의 부당한 논문 조작에 대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할 엄두조차 못 냈다고 한다. 일방적인 상하관계가 엄격한 실험실의 문화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다 ‘대학원생=값싼 노동력’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석박사 과정 연구원들은 더욱 주눅이 든다. 학위논문 통과가 최대 목표인데 지도교수와 돈 문제 때문에 갈등을 일으켰다가 행여 불이익을 받을지 몰라 항의하지 못하는 게 다반사.

B 교수는 “한 예로 작년까지 정부의 두뇌한국(BK)21 사업 지원을 받은 연구실에서는 석사과정생 40만 원, 박사과정생 60만 원의 ‘월급’이 책정됐다”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연구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판에 별도의 아르바이트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학원생들에겐 최소한 등록금과 생활비가 보장돼야 한다”며 “실험실의 민주적인 운영은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훈기 동아사이언스 기자 wolfkim@donga.com

전문가들 “연구부정 감시할 정부기구 필요” 지적

황우석 서울대 교수팀의 논문 조작 사건으로 정부가 앞으로 과학자의 연구 성과를 어떻게 검증해야 할지가 과학계의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흐름에서 미국의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설치돼 있는 연구진실성위원회(ORI)가 주목받고 있다. 최근 서울대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ORI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경우 보건부 산하에 각 대학이나 연구기관의 ORI를 총괄하는 ORI가 있다.

각 대학이나 연구기관의 ORI는 과학자들의 연구가 정직한 것인지 아닌지를 관리한다. 이들 ORI는 데이터를 조작하거나 다른 연구자의 논문을 베끼는 등의 기만행위를 조사한다.

보건부 산하의 ORI는 조사결과를 참고해 부정행위자의 연구 자체를 취소하거나 지원하던 예산을 회수한다.

한국에도 미국의 ORI처럼 예산을 지원하는 과학기술부나 보건복지부에 연구의 부정행위를 관리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게 관련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하지만 국가 연구개발(R&D) 평가는 국회를 통해 검증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한편에서는 연구 부정행위를 적발하고 처벌하는 것보다 예방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울대 의사학교실 김옥주(金玉珠) 교수는 “말단 연구원에서부터 연구 책임자까지 구체적인 연구 윤리를 교육받고 정직하게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부정행위를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이번 사건으로 박기영(朴基榮) 대통령정보과학기술보좌관이 사의를 표명했지만 정부 차원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황 교수 지원 프로젝트를 총괄한 김병준(金秉準) 대통령정책실장과 진대제(陳大濟) 정보통신부 장관 등도 문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충환 동아사이언스 기자 cosmo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