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 '디지털 금융'사업 주먹구구…충분한 검토없이 시작

  • 입력 2000년 3월 19일 19시 59분


시중은행들이 디지털금융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으나 수익성과 비용절감 등의 밑그림이 전혀 없어 적지 않은 부작용이 예상된다.

특히 은행들의 인터넷뱅킹 경쟁은 미래투자라는 명목으로 경쟁은행이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모습이어서 자칫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투자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비용 얼마들지 몰라요”〓지난달말 한 시중은행은 기자들을 모아놓고 디지털금융기관의 비전을 제시했다. 금융포털시스템, 기업간(B2B) 거래시스템 구축, 인터넷쇼핑몰 유치 등 최근 유행하고 있는 모든 아이템을 이 자리에서 발표했다. 그러나 향후 이같은 사업에 얼마의 비용이 들어갈지, 또 올릴 수입이 어느 정도나 될지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하드웨어 장비에 투자될 금액만을 제시한 정도였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일부 은행이 인터넷뱅킹을 들고 나오자 나머지 은행들이 충분한 검토 없이 부랴부랴 인터넷뱅킹 서비스 등 디지털금융 전략을 내놓고 있다”며 “심지어 대출 신청만 인터넷으로 받고 대출심사 신용평가 등은 여전히 수작업으로 하는 무늬만 인터넷뱅킹인 은행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용근(李容根)금감위원장이 최근 요구한 구체적인 ‘디지털금융의 청사진’을 당장 제시할 수 있는 시중은행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게 은행권의 솔직한 반응.

한국금융연구원 권재중(權才重)연구위원은 “인터넷환경이 워낙 급변하기 때문에 사업방향 설정과 비용 및 수익 산출 등의 밑그림을 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며 “그러나 인터넷뱅킹에서 앞선 미국 은행의 경우 충분한 전략을 세우고도 수익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준비없는 디지털 금융은 오히려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출혈경쟁 우려〓지난달 신한은행이 인터넷뱅킹의 계좌이체 수수료를 받지 않고 대출금리를 인하하는 등 공격적인 경영전략을 내놓자 무한경쟁이 본격 시작된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신한은행의 인터넷뱅킹 고객이 이 조치 덕분에 두 배 가까이 증가하자 다른 시중은행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따라가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무작정 따라갔다가는 손해보는 장사가 뻔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인터넷뱅킹을 통해 인건비 절감과 다른 부문의 수익이 늘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수수료 면제 등의 경쟁이 벌어지면 출혈경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금융연구원은 최근 내놓은 ‘인터넷뱅킹의 현황과 과제’라는 보고서에서 시중은행이 올해 지난해의 두 배에 가까운 정보기술투자를 하고 있지만 영업전략에 맞는 적절한 투자가 되지 않거나 은행간 중복투자로 비효율적인 투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박현진기자>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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