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들 「사이버괴담」 『톡톡』…한밤 「컴퓨터 피서」

  • 입력 1998년 8월 9일 20시 27분


습기를 머금은 뜨거운 공기가 살갗을 스멀거리는 여름. 등골이 오싹한 얘기로 더위를 쫓아보자. 요즘 ‘괴담’의 주인공은 더이상 처녀귀신이나 구미호같은 ‘설화적’인 존재가 아니다. ‘IMF악령’이 불러온 삶의 ‘끔찍함’이 바로 괴담의 주제.

▼ 취업준비에 바쁜 대학졸업반 승호. 어느날 PC통신으로 전자우편을 받는다. 발신인의 ID는 ‘LivE’. ‘네가 원하는 것을 주마. 집앞 편의점 쓰레기통 옆을 봐라.’ 다음날 승호는 LivE가 알려준 장소에서 1등으로 당첨된 복권을 발견한다.

▼ PC통신 하이텔의 인기 괴담작가 유일한씨의 괴담집 ‘어느날 갑자기’중 ‘E메일’편. 취업불안에 시달리는 승호는 악마(LivE를 뒤로 읽은 EviL)의 편지를 한 장씩 받을 때마다 조금씩 변해간다.낯선 이로부터의 편지. 사이버세대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 아닌가. 인터넷과 PC통신을 통해 쇄도하는 광고문과 사기성 편지들. 승호의 경우는 단지 상대가 악마일 뿐.

▼ LivE의 두 번째 편지. ‘오늘 밤 10시 동네 버스정류장에서 회색양복을 입은 사람이 주는 것을 받아라.’ 그 곳에서 승호는 자신을 술집 종업원으로 착각한 회색양복의 취객이 막무가네로 건네는 지갑을 받아든다. 현금 6백만원을 챙기고 현금인출기에서 카드로 수 백만원을 찾는다.

▼ 요즘 PC통신에 올라와 있는 공포물의 대표적인 두 갈래는 ‘괴담’(怪談)과 ‘공포환타지’.괴담은 ‘컴퓨터실에서 죽은 아이’ ‘교내방송에서 들리는 죽은 친구의 목소리’식의 이야기들. 중고생들이 주 원작자로 추정되며 학교나 사회생활의 불만에 현실의 부조리가 양념으로 가미된다.‘공포환타지’는 94년 하이텔 ‘summer’란에 연재됐던 이우혁씨의 ‘퇴마록’이 기원. 철저한 사전취재를 바탕으로 황당무계한 가설에 현실감을 불어넣으며 수 개월씩 시리즈로 연재되기도 한다. 최근 하이텔에 ‘사자의 나라’를 연재했던 작가 이종호씨는 “전통장례절차 무속 초능력 무속인저술 등 20여권의 관련서적을 탐독했다. 흉가의 분위기를 충실히 전하기 위해 경북 산골의 버려진 한옥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고 설명.

▼ ‘동네 지하철역 물품보관함에 세번째 선물이 들어있다’는 세번째 메시지. 승호가 발견한 것은? 같은 과 동료지만 외제차를 몰고 다니며 여대생 농락을 일삼는, 평소 ‘죽이고 싶도록’ 밉던 철진의 머리.

▼ 덕성여대 심리학과 김미리혜교수. “사람은 어느 정도의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자극이 없거나 지속적으로 같은 수준의 자극만 있는 생활은 정서를 불안하게 한다. ‘괴기담’은 이런 생활에 청량제역할을 할 수 있다.”

▼ 저녁 뉴스를 본 승호.충격에 몸을 떤다. ‘한 남자가 폭행을 당해 숨진 채 발견됐으며 지갑은 범인이 갖고 달아났다. 토막살인을 당한 20대 남자의 머리가 지하철역 물품보관함에서 발견됐다. 경찰은 지하철역과 은행 CCTV에 찍힌 모습으로 봐 동일범의 소행인 것으로 보고….’

▼ 당신은 자기도 모르게 ‘악마’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가 IMF를 원했던가.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불러들인 IMF라는 흉물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진저리치고 있다. 당신 하나 하나의 허세와 나태함이 수 십만명의 ‘목’을 자르고 있건만 당신은 그것을 악마의 짓으로만 치부한다.

▼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또 한 사람과의 만남. 아파트 놀이터로 가라는 악마의 편지를 받은 승호는 같은 악마로부터 자기를 죽이라는 메세지를 받은 앞 동 아파트 경비원과 목숨을 건 혈투 끝에 승리. 그러나 잠시 후 경찰이 들이닥치자 창문으로 몸을 던지는 승호…. 이 때 악마는 ‘Lived’라는 새 ID로 누군가에게 또 편지를 보내고 있다.

▼ Lived를 뒤로 읽어보라. 그러나 등 뒤를 돌아보지 말라….

〈나성엽기자〉news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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