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월드워치]에너지대국 러시아 횡포

  • 입력 2005년 4월 24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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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일본 언론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다음 달 9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 기념 정상회의에 참석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회의 불참을 공식 발표했던 고이즈미 총리가 막판에 마음을 바꾼 것.

세계적인 에너지 메이저인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의 존 브라운 회장도 22일 급히 모스크바로 달려와 통사정 끝에 간신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고 돌아갔다.

두 사람은 왜 푸틴 대통령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일까. 러시아 내 에너지 개발 프로젝트 때문이다.

이처럼 ‘에너지 대국’으로 떠오른 러시아의 위세 앞에 강대국은 물론 에너지 메이저들조차 고개를 숙이고 있다. 더구나 푸틴 정권이 에너지 산업의 국가 통제를 강화하면서 기존 정책을 ‘하룻밤 사이’에 뒤집거나 무시해도 이들은 꼼짝없이 당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가 모스크바행을 결심한 것도 ‘다 잡았다’고 여겼던 동시베리아 송유관 사업을 다시 놓칠 위험에 빠졌기 때문.

원래 동시베리아 송유관은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이 공을 들여 양국 정상이 합의까지 했던 사업. 그러나 자본력을 내세운 일본이 이 사업을 가로채 지난해 말 일본에 유리하게 송유관 노선이 확정됐다. 그런데 최근 쿠릴열도 4개 섬의 영유권 분쟁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되면서 사업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당초 러시아 앙가르스크∼중국 다칭(大慶)으로 돼 있던 송유관 노선이 지난해 말 일본에 유리한 러시아 타이셰트∼스코보로디노∼페레보즈나야로 조정됐다가 원안으로 돌아온 것.

일본은 다급해지고 중국은 기사회생한 셈이지만 양국 모두 내심 “러시아가 송유관을 지렛대로 우리를 농락하고 있다”며 불쾌한 표정이다.

자존심이 상한 것은 콧대 높기로 유명한 BP의 브라운 회장도 마찬가지. BP는 2003년 53억 달러(약 5조3000억 원)를 투자해 러시아 석유회사 TNK와 50 대 50으로 BP-TNK를 세워 러시아 에너지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최근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 지분이 51%가 넘는 기업에만 유전개발 사업권을 주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BP가 발칵 뒤집혔다. 러시아에서 추진 중인 100여 개 에너지 개발사업 참여가 원천적으로 봉쇄될 상황이 된 것.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BP-TNK는 세무당국으로부터 220억 루블(약 7885억 원)의 체납세금 추징 통고까지 받았다.

1999년 한-러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시베리아 코빅타 가스전 개발사업도 한국 측이 타당성 조사까지 마쳤으나 러시아 정부는 이런저런 구실을 내세워 최종 허가절차를 미루고 있다.

옛 소련이 군사력과 이념으로 세계의 절반을 지배했던 것처럼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로 영향력을 회복하려 한다는 분석이 있다. 옛 소련 국가들과 유럽의 경우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절대적이어서 벌써부터 러시아의 눈치를 보고 있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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