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이전 위헌]‘民意’로 무장한 3人, 골리앗 이기다

  • 입력 2004년 10월 21일 18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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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의를 무시한 수도 이전’의 물길을 되돌려 놓은 주역은 수도 이전 헌법소원 사건의 청구인 대리인단이다. 통상적인 소송이나 헌법소원 사건에서는 당사자(청구인)가 먼저 정해지고, 이들이 대리인(변호사)을 선임하지만 이번 사건에서는 달랐다. 대리인단이 먼저 구성되고 이들이 청구인들을 모집한 것. 대리인단은 이처럼 처음부터 이 사건을 주도했다. 대리인단은 김문희(金汶熙·67·고등고시 10회) 이영모(李永模·68·〃13회)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과 이석연(李石淵·50·사법시험 27회·전 헌재 연구관) 변호사 등 3명으로 조촐하게 구성됐다.》

이들은 헌재 출신이라는 점 외에 모두 정치로부터 초연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정치권 어디에도 기웃거린 적이 없다.

이들은 헌법소원 청구 소식이 알려지면서 수십명의 후배 변호사들이 대리인단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사양했다고 한다. ‘변호사가 불필요하게 많이 나서면 정치적으로 세를 과시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만큼 정치성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법리’와 ‘실무’ 중심으로 사건을 진행해왔다.

김 전 재판관은 1988년 헌재가 출범할 당시 재판관으로 선임돼 2000년까지 헌재의 1, 2기에 걸쳐 12년간 재판관을 지냈다. 역대 최장수 기록.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이 전 재판관과 함께 헌법소원 의견서와 추가변론서 등을 직접 작성했다. 동료 재판관이던 황도연(黃道淵·70·고시 10회) 전 재판관 및 이 전 재판관과 함께 서울 신촌 인근에서 법무법인 ‘신촌’을 설립한 뒤 보조 변호사 없이 손수 일을 처리한다.

이 전 재판관은 헌재 재판관 시절 ‘소수 재판관’으로 불렸다. 사회·경제적 약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소수의견을 많이 냈기 때문이다. 2000년 4월 헌재가 과외 금지 규정을 위헌이라고 결정할 때 혼자서 합헌의견(과외 금지는 정당하다는 의견)을 낸 것이 대표적인 사례. 그가 낸 108건의 소수의견은 역대 헌재 재판관 중 최다 기록이다.

법조계에서는 그의 소수의견이야말로 ‘국민의 다수의견’을 대변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국민의 가슴을 대변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그는 길지 않은 헌재 역사에서 ‘위대한 소수자’로 기억된다.

헌재 재판관 퇴임 후 그는 재판관 시절의 소수의견을 모아 ‘소수와의 동행(同行)’이라는 제목의 의견집을 냈다. 헌재가 이번 사건에서 그의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민의(民意)와의 동행’을 한 셈.

사는 방식에서도 그는 소수자의 면모를 보여 준다. 1978년 분양받은 서울 강남구 논현동 경복아파트에서 26년째 살고 있으며 식탁도 그때 마련한 것을 아직도 쓰고 있다. 서울고법 원장과 헌재 재판관을 지낸 거물급 변호사에 어울리지 않게 지하철을 타고 신촌의 사무실까지 출퇴근한다. 경남 의령농고를 나와 고학으로 고시에 합격했으며 합격 후 부산대 법대를 다녔다.

이석연 변호사는 전북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9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법제처 사무관 등 공무원으로 있다가 1985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89년 사법연수원 수료 후 법원과 검찰 대신 당시 갓 출범한 헌법재판소의 연구관직을 택했다.

1994년 변호사로 개업해서도 헌법사건을 주로 맡으며 ‘헌법전문 변호사’로서의 명성을 쌓았고 시민단체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사무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변호사는 이번 헌법소원 사건에서 실무간사로 언론 브리핑과 인터뷰 등을 도맡았다.

이들과 법리논쟁을 한 정부측 대리인단은 대형 로펌들이 맡았다. 청와대와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는 전직 대법관을 포함해 변호사 수만 100명이 넘는 법무법인 ‘태평양’을, 건설교통부는 전직 대법원장이 있는 법무법인 ‘화우’를 대리인으로 선임했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다윗이 승리한 격’이라고 말한다.

이수형기자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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