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64>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9월 22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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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자방(子房)과 대장군을 부른 까닭은 항왕과 제왕(齊王) 전영의 싸움이 어떻게 되는가보다는 이제 과인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묻기 위해서였소. 그런데 두 분이 보는 바가 다르니 과인도 어찌해야할지 모르겠소.”

하지만 그런 한왕의 물음에 대해서는 두 사람의 답이 같았다.

“아직은 가볍게 움직일 때가 아닌 듯합니다. 당분간은 이대로 관중에 머물러 대한(大漢)의 기반을 다지면서 조용히 관동(關東)의 변화를 살피도록 하십시오. 그러다가 때가 무르익으면 함곡관을 나가 멍석을 말 듯 천하의 형세를 결정지으셔야 합니다.”

한신이 그렇게 대답하자 장량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뜻을 같음을 나타냈다. 그런데 며칠도 안돼 다시 한왕의 마음을 관외(關外)로 쏠리게 하는 일이 생겼다. 마침내 북지(北地)가 한군(漢軍)에게 떨어졌다는 소식이 그랬다.

<기도위(기도위) 근흡(근(섭,흡))이 북지를 우려 빼고 옹왕 장함의 아우 장평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밖에도 기도위는 농서의 여섯 현(현)을 평정하고 거사마(거사마)와 군후(군후) 넷, 기장(기장) 열둘을 죽였으며, 수만 군사에게서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이제 관중은 온전히 한나라 땅이 되었으니 대왕께서는 기뻐하시옵소서.>

그와 같은 글을 받은 한왕은 다시 장량과 한신을 불러 의논했다.

“근흡이 북지까지 우려 빼 이제는 등 뒤를 걱정할 일이 없어졌소. 또 우리 장졸들도 어지간히 쉬었으니, 패왕이 제나라에 묶여 있는 틈을 타 다시 한번 중원으로 나가보면 어떻겠소?”

한왕이 그렇게 묻자 장량과 한신은 아직도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왕이 그 까닭을 묻자 두 사람이 서로 거들어 가며 말했다.

“듣기로 항왕은 성양(城陽)에서 한 싸움으로 제왕(齊王) 전영의 대군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합니다. 전영은 군사 약간과 겨우 몸을 빼내 평원(平原)으로 달아났으나 항왕의 무자비한 보복을 겁낸 그곳 백성들에게 목을 잃고 말았습니다. 평원 백성들에게서 전영의 목을 받은 항우는 옛 제왕 전건(田建)의 아우 전가(田假)를 찾아 다시 제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남은 전영의 세력을 쫓아 북해(北海)로 갔다고 하는데, 언제 군사를 돌려 서쪽으로 달려올지 모릅니다. 아직은 가볍게 관외로 나갈 때가 아닙니다.”

그들의 말로 미루어 두 사람이 모두 관동에 풀어놓은 세작들을 통해 세심하게 관동의 형편을 살피고 있는 듯했다. 장량과 한신이 입을 모아 그렇게 말리자 한왕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때껏 해온 대로 다시 관중에서 내치(內治)를 다지는데 힘과 정성을 쏟았다.

한왕은 북지를 차지해 관중을 온전히 다스리게 되었음을 경축한다는 핑계로 크게 사면령을 내려 백성들의 마음을 다시 한번 어루만져 주었다. 한왕이 처음 관중에 들었을 때, 모든 법을 없애고 다만 석 줄만 남긴 적이 있었다. 이른 바 ‘약법삼장(約法三章)’으로, 그 일은 한왕이 관중의 인심을 얻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뒤늦게 관중에 들어온 패왕 항우는 다시 진나라의 모든 법을 되살리고 오히려 자신의 엄한 군율을 보탰다. 따라서 백성들은 여전히 진나라의 엄한 법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어지럽게 뒤바뀌는 형세에 치여 이쪽저쪽 죄를 짓고 쫓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걸 한왕이 다시 풀어주었으니 관중 백성들이 고마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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