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11>卷三. 覇王의 길

  • 입력 2004년 3월 11일 17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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覇上의 眞人(1)

이끌던 3만 대군을 모조리 풀고도 힘든 싸움 끝에 무관(武關)을 차지한 패공은 한동안 그곳에 쉬며 군사를 정비했다. 관중을 지키는 네 개의 관문 중에 하나라 그런지 무관을 지키는 진군(秦軍)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진나라에서 이름난 장수가 거느린 것도 아니요, 관중에서 골라 보낸 군사도 아니었으나, 패공은 적지 않은 장졸과 물자를 잃고서야 겨우 그들을 쳐부수고 관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무관에 머문 지 보름, 지친 군사들이 기력을 되찾고 잃은 물자도 넉넉히 채워졌다 싶자 패공 유방은 마침내 군사를 움직였다. 이세 황제 3년 9월의 일이었다. 관중에 들었다고는 하나 무관에서 함양에 이르기 위해서는 아직도 넘어야할 험한 고개가 많았다. 5백 리가 넘는 길 곳곳에 자리잡은 진나라의 성곽들과 관진(關津)이 그랬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패공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요관(嶢關)이었다. 요관은 무관 서쪽이요, 남전(藍田) 남쪽에 있는 요산(嶢山) 기슭에 세워진 관문이었다. 비록 무관만큼 높고 험한 길목은 아니었으나, 무관에서 한번 크게 곤욕을 치른 패공은 먼저 사람을 보내 요관의 사정부터 살펴보게 했다. 그런데 정탐을 갔던 군사가 돌아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진나라에 큰 변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승상 조고가 이세 황제를 죽이고 공자 자영(子영)을 진왕(秦王)으로 세웠는데, 자영이 다시 조고를 죽인 것입니다. 병을 핑계로 조고를 재궁(齋宮)으로 꾀어낸 자영은 두 아들을 시켜 조고를 베어 죽이고 그 삼족을 모두 없앤 뒤에 야 왕위에 올랐다는 소문입니다. 그런 다음 자영은 안으로 어지러운 조정을 추스르는 한편 밖으로는 관문마다 새로운 장수들을 뽑아 보내 방비를 굳건히 했습니다. 요관에도 자영이 새로 보낸 뽑아 보낸 장수가 와서 지키는데, 그 기상이 자못 씩씩하다 합니다.”

그 말을 듣자 유방은 크게 걱정이 되었다. 곧 막빈(幕賓)과 장수들을 불러 모아 놓고 요관의 형편을 일러주며 계책을 물었다. 장량이 일어나 말했다.

“관중에 있는 진나라 군사들은 아직 강성하여 옛날의 기세가 살아있습니다.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따로 풀어놓은 군사들에게서 들으니, 이번에 자영이 새로 뽑아 보낸 진나라 장수는 백정의 자식이라 합니다. 백정의 자식이라면 장사치와 마찬가지로 돈이나 재물로 쉽게 그 마을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패공께서는 본진(本陣)과 함께 잠시 이곳에 머물러 계시고, 먼저 사람을 보내 싸우지 않고 항복 받을 길을 열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5만 명이 먹을 군량을 마련하게 하고, 모든 산 위에 깃발을 꽂고 군막을 세워 의병(疑兵)으로 우리 군사가 대군인 양 꾸민 뒤에, 많은 재물로 적장을 달래보도록 하십시오. 역((력,역))선생 이기(食其)나 육가(陸賈)처럼 말 잘하는 이들에게 금은보화를 듬뿍 주어 적장들을 달래게 한다면 요관 뿐만 아니라 다른 성읍을 지키는 장수들도 어렵지 않게 매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방이 들어보니 그럴듯한 계책이었다. 곧 군사를 멈추게 하고 먼저 사람을 보내 많은 군사가 먹을 군량과 잠잘 군막을 사들이게 하여 거느린 군사가 5만이 넘는 대군으로 보이게 꾸몄다. 그런 다음 역이기와 육가에게 황금 수만 냥과 거기까지 오는 길에 거둔 보물 중에 진귀한 것을 골라주며 서쪽으로 보내 진나라 장수들을 달래보게 했다.

그때 요관을 지키는 장수는 주괴(朱魁)란 자였다. 함양성 밖에서 소와 돼지를 잡아 팔던 백정의 아들이었는데, 용력이 뛰어나고 눈치가 빨라 병졸에서 장수로 뛰어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자랄 적에 보고 들은 것이 그뿐이었던 탓인지, 장량이 헤아린 대로 재물에 약해 그 때문에 종종 일을 그르쳤다.

새 임금의 믿음을 입어 수도 함양의 목줄기 같은 요관을 맡게 된 주괴는 우쭐하여 큰소리부터 쳤다.

“나 주(朱)아무개가 요관을 지키는 한 나는 새도 요산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방비를 전보다 배나 굳게 했다. 낮은 곳은 높이고 엷은 곳은 두텁게 하여 성벽을 굳건히 하였으며, 군사들을 다잡아 언제든 적을 맞을 채비를 갖추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몰래 정탐하는 군사들을 풀어 다가오는 초나라 군사들의 움직임도 살펴보게 하였다.

오래잖아 정탐하러 갔던 군사가 돌아와 말했다.

“적의 세력이 뜻밖에도 강성해 보였습니다. 군량을 사들이는데 5만 명이 먹을 것이라며 시골 구석구석을 들쑤시고 다닙니다. 또 군막도 5만 명이 쓸 것이라며 베란 베는 다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이미 지니고 있는 것도 있을 터인데 다시 5만 명이 쓸 것을 더 모은다니, 도대체 몇 만 대군이 오고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속지 마라. 놈들의 허장성세(虛張聲勢)다.”

주괴가 가장 병법에 밝은 척 그렇게 받았으나 마음속으로는 걱정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다시 관문을 지키는 젊은 낭장(郎將)이 들어와 알렸다.

“웬 술 취한 늙은이가 나귀 한 마리와 시중꾼 하나를 데리고 관문 앞에 와서 장군께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나를 안다고 하더냐?”

“예. 장군의 성함을 대면서 만나 뵙고 긴히 여쭐 말씀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늙은이 이름이 무어라고 하더냐?”

“역이기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고양 땅의 한 술꾼[고양일주도]이라고만 일러달라고 합니다.”

보아하니 무관을 넘었다는 유방인가 뭔가 하는 초나라 장수가 보낸 세객(說客)인 듯 하구나. 들여보내라. 내 들어보고 그 늙은 것의 혀를 잘라놓겠다.”

주괴가 이번에도 그렇게 큰소리치며 역이기를 불러들이게 했다. 오래지 않아 등이 휘어지도록 짐을 실은 나귀의 고삐를 끌고 있는 육가와 함께 역이기가 관 안으로 들어왔다. 두 다리가 꼬이고 몸이 흔들거리는 게 몹시 취해 보였다.

주괴가 기다리는 객사로 안내된 역이기는 나귀와 육가를 뜰에 세워두고 홀로 방안으로 들어갔다. 역이기가 손을 내저어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내쫓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내 장군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소이다. 잠시 좌우를 물리쳐 주시지 않으시겠소?”

그런 역이기의 청을 들어 부리던 사람을 모두 방밖으로 내보낸 주괴가 손으로 칼집을 툭툭 치며 얼러댔다.

“노인장,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는지 모르지만 칼에는 노인을 알아보는 눈이 없으니 조심하시오. 도적들의 세객으로 와서 함부로 혀를 놀리다가는 흰 터럭 뒤집어 쓴 그 머리가 어깨 위에 남아나지 않을 것이오!”

그 말에 역이기가 한바탕 껄껄 웃더니 취한 시늉을 그만두고 말했다.

“이 늙은 것이 장군을 속이려 들 리 있겠습니까? 다만 이리로 오는 도중에 알지 못할 물건을 주운 것이 있어 그게 무엇인지 눈 밝으신 장군께 물어보고자 왔습니다.”

그리고는 소매에서 주먹만한 금덩이 하나를 꺼내 주괴에게 내밀었다.

“어떤 곳에 이렇게 빛나면서도 무거운 돌덩이가 수북히 쌓여 있었습니다. 그 중에 몇 덩이를 가져왔는데 장군께서는 이게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주괴가 받아보니 틀림없이 순금덩이였는데 어림잡아도 닷 근(그때의 한 근은 200g 정도)은 되어 보였다.

“이건 황금 아니요?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거요?”

주괴가 그렇게 어이없어 하며 되물었으나 그 목소리는 이미 욕심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때 역이기가 다시 소매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런 것도 그 곁에 많이 있었습니다만 이 늙은 것은 도무지 눈이 어두워서… 장군께서는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주괴가 얼결에 받아보니 이번에는 스스로 빛을 내고 있는 듯한 굵은 구슬이었다. 듣기로 한 알이 천금에 값한다는 야명주(夜明珠) 같았다. 이제는 눈길까지 완연히 달라진 주괴가 스스로 역이기에게 한발 다가들며 물었다.

“이런 구슬이 하나도 아니고 여럿 있었다 했소? 그게 어디요? 어디 그런 데가 있었소?”

하지만 역이기는 대답 대신 능청스러울 만큼 딴전을 피웠다.

“그런데 오다가 한 곳에서는 이것들과는 달리 끔찍한 것도 보았습니다.”

“그건 무엇이었소? 어디서 무엇을 보셨소?”

“관문에 매달린 진나라 장수의 머리였습니다. 패공 유방에게 맞서다 죽은 무관(武關)의 수장(守將)의 머리였지요.”

그제야 주괴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재물 때문에 반나마 흩어진 얼을 다잡으며 칼집을 움켜쥐었다.

“이 늙은이가 정말로 도적들의 세객이었구나. 내게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이냐?”

목소리는 제법 높았으나 이미 처음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역이기가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

“나는 장군을 양쪽 어디든지 모셔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를 따라 금은보화가 쌓인 곳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나를 죽이고 이곳 관문에 장군의 머리가 매달리게 하겠습니까?”

“그 무슨 요망스런 소리냐?”

“곧 천명을 받들어 패공께 요관을 열어주고 살아 부귀를 누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천명을 어기고 패공께 맞서다가 끝내는 머리 없는 귀신이 되시겠습니까?”

나지막하지만 듣기 섬뜩한 소리였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런 물음이라 그런지 주괴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역이기가 다시 은근하게 덧붙였다.

“이미 하늘은 진나라를 버렸습니다. 거기다가 진나라는 장군께 땅을 떼어준 것도 아니고 백성들을 갈라 맡기지도 않았습니다. 곧 장군께서는 반드시 지켜 내야할 봉토(封土)도 백성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망해 가는 진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지시려는 것입니까? 차라리 우리 초나라에 투항하여 남은 삶을 새로이 도모함만 같지 못합니다.”

그러자 한동안 말이 없던 주괴가 이윽고 긴 한숨과 함께 말했다.

“듣고 보니 반드시 틀린 말은 아니나, 이 요관은 나 혼자 지키는 게 아니오. 부장(副將) 한영(韓榮)과 사마(司馬) 경패(耿覇)가 있어 각기 한 갈래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설혹 마음을 바꾼다 해도 나 혼자서는 관(關)을 내줄 수가 없소.”

역이기가 기다렸다는 듯 그 말을 받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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