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는 일본]<2>디지털 패권, 미국에서 일본으로

  • 입력 2003년 11월 25일 1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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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시대는 미국의 무대였다. 그러나 포스트PC시대에는 일본이 패권을 쥘지 모른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카메라폰과 디지털 카메라 등에서 보듯 화상 관련 기기에서는 일본 업체의 경쟁력이 여전히 막강하기 때문. 오사카에 있는 일본 산요의 디지털 카메라 생산 라인. 사진제공 아사히신문
PC시대는 미국의 무대였다. 그러나 포스트PC시대에는 일본이 패권을 쥘지 모른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카메라폰과 디지털 카메라 등에서 보듯 화상 관련 기기에서는 일본 업체의 경쟁력이 여전히 막강하기 때문. 오사카에 있는 일본 산요의 디지털 카메라 생산 라인. 사진제공 아사히신문
《‘일본은 당분간 정보기술(IT) 후진국으로 남는 게 아닐까.’ 이런 궁금증을 품는 것은 20세기 후반까지 세계 IT업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독주는 끝이 없었다. 1946년 세계 최초의 컴퓨터인 에니악 이후 미국은 중대형 컴퓨터, 개인용 컴퓨터(PC), 중앙처리장치(CPU), 운영체제(OS)를 장악했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와 인텔은 ‘윈텔(윈도+인텔)’이라는 이름으로 콤비 플레이를 펼치며 IT업계의 최강자로 군림해왔다. 이 같은 상황은 90년대 들어 인터넷시대가 열리면서 더욱 강화됐다.》

제조업에서 미국의 포드 시스템을 특유의 유연(柔軟)생산방식으로 압도했던 일본은 자존심이 상할 만했다.

일본은 80년대 이후 독자적인 표준을 들고 미국과 맞섰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1984년 도쿄대 사카무라 겐(坂村健) 교수가 주축이 돼 OS인 ‘트론’을 발표했지만 PC시장에서 MS의 도스와 윈도에 밀려 세계 표준화에 실패했다. 2세대 무선통신 방식을 놓고 한국과 미국의 ‘CDMA’나 유럽의 ‘GSM’이 아닌 ‘PDC’라는 독자 표준을 발표했지만 국내용으로 전락했다. 1986년 세계 최초로 고선명(HD)TV의 실험 방송에 성공한 것도 일본이었지만 90년대 들어 미국과 유럽에 역전됐다.

‘잃어버린 10년’ 내내 일본 내에선 IT산업의 대두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러나 취재진이 찾은 일본에선 뜻밖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디지털 패권이 일본으로?=20일 도쿄 최대의 전자상가인 아키하바라. 진열장에는 카메라폰, 디지털 카메라, 각종 디지털 AV기기들이 넘쳐났다. 전자제품 매장 라옥스의 직원인 사쿠라자카 가오리(櫻坂佳折)는 휴대전화를 둘러보는 기자에게 “100만화소급 최고급 카메라폰을 찾는 고객이 많다”고 말했다. 100만화소 이상의 휴대전화는 한국에선 아직 본격적으로 시장이 열리지 않았지만 이곳에선 불과 30만원 정도에 팔리고 있었다.

샤프가 처음 내놓은 카메라폰은 없던 시장을 일본이 창조해낸 제품. 일본의 앞선 광학기술과 휴대전화를 결합해 디지털 시대의 히트상품으로 만들었다.

카메라폰은 전 세계적으로 2001년 400만대에서 올해 7500만대, 2006년 2억대의 시장이 형성될 전망이다. 1996년 불과 75만대였던 디지털 카메라 시장은 올해 3700만∼4300만대에 이른다. 카메라폰은 일본기업이 세계시장의 75%를, 디지털 카메라는 8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사실 2000년 이후 PC 시장의 성장은 정체를 보이고 있다. 거의 포화상태인 것. 반면 일본이 경쟁력을 갖고 있는 카메라폰이나 디지털 카메라 시장은 ‘1인 1기기’ 개념이다. 엄청난 성장잠재력 때문에 일본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안을 들여다보면 더 놀랍다.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전화에 쓰이는 ‘전자 눈’인 영상표현 반도체 CCD는 전 세계적으로 100% 일본제다. DVD플레이어는 중국이 최대 생산국이지만 핵심 부품인 광픽업(바늘)은 소니와 산요가 메이저 플레이어다. 수요가 늘고 있는 중소형 액정표시장치(LCD)에선 일본 샤프가 세계시장의 50%를 지키고 있다. LCD TV와 PDP TV에서도 일본은 선두를 지키고 있다. PC시대에는 미국에 뒤졌지만 포스트PC 시대를 겨냥한 다양한 제품군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있다.

노무라종합연구소 미타라이 히사미(御手洗久巳) 수석 컨설턴트는 “아날로그 방식의 음향 영상(AV) 기기들이 디지털 방식으로 바뀌는 시점이 오면서 AV기기 쪽에 강점을 가진 일본에 기회가 왔다”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컬러TV와 비디오의 패권을 쥐고 AV산업의 기술 혁신을 이끌어온 일본 메이커가 AV의 디지털화 및 고부가가치화 시대, ‘포스트 PC’ 시대를 맞아 다시 전면에 나서고 있다는 이야기다.

▽‘윈텔’을 넘어서=MS의 연간 매출액은 320억달러, 인텔은 268억달러에 이른다. 하나는 소프트웨어로, 또 하나는 하드웨어로 미국에 디지털 패권을 가져다준 IT업계의 양대 산맥이다. 둘 다 표준화로 IT업계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과연 일본업계가 ‘윈텔’의 벽을 넘어 디지털시대 패권을 가져올 수 있을까. 일본에는 이들을 상대할 숨은 무기라도 있는 것일까.

‘트론’의 개발자인 사카무라 교수를 만났다. “트론이 이미 전 세계 OS의 60%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카무라 교수의 말에 취재팀은 당혹스러웠다. 다용도 운영체제인 ‘트론’은 PC시대에는 윈도보다 확장성이 떨어져 실패했지만 ‘부팅하는 데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장점 때문에 휴대전화와 자동차, 정보가전 등에서 이미 널리 쓰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동화상 시대로 진입할수록 트론의 시장점유율이 더 커지리라는 전망.

소니도 주목할 만하다. 삼성경제연구소 기술산업실 이용화(李鏞和) 수석연구원은 “게임용으로 특화된 소니의 시스템LSI 반도체는 그래픽과 동영상 처리 속도가 탁월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데이 노부유키(出井伸之) 소니 회장은 “차세대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X로 ‘윈텔’ 진영에 정식으로 도전장을 던지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쓰는 PC의 시장은 한정돼 있다. 포스트PC 시대가 오면 PC를 대신할 어떤 새로운 제품이 나올지 모르지만 그래픽 기능이 갈수록 강화되는 것은 분명하다. 소니는 시스템LSI 설비투자에 5000억엔을 쏟아 붓겠다며 칼을 갈고 있다. ‘이츠 소니(It’s Sony!)’의 꿈이 이뤄질 날을 기다리며.

2003년 11월. 일본에선 디지털 패권을 향한 숨은 야심이 꿈틀거리고 있었다.특별취재팀


주요 일본 반도체업체 설비 투자 추이 (단위:억엔, %)
2000200120022003
도시바1700(73.5)500(-70.6)660(32.0)1180(78.8)
NEC2170(44.7)815(-62.4)725(-11.0)740(2.1)
소니2200(33.9)500(-77.3)410(-18.0)700(70.7)
마쓰시타1500(200.0)720(-52.0)550(-23.6)600(9.1)
후지쓰1968(123.9)1223(-37.9)380(-68.9)350(-7.9)
( )안은 전년대비 증가율. - 자료:일본 반도체산업신문

▼84년 일본식 OS '트론'개발 사카무라 교수 ▼

도쿄대 사카무라 겐 교수(52·사진)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스케줄이 꽉 차서 만날 수 없다”는 그를 도쿄 고단다의 사무실에서 만난 건 21일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점심시간을 쪼개서 인터뷰 시간을 내는 그를 보면서 최근 ‘일본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난해 일본 언론들은 앞 다퉈 사카무라 교수의 인터뷰 내용을 실었다. 한 방송사는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송하기도 했다. 사카무라 교수는 ‘잃어버린 10년’을 보낸 일본에 다시 영광을 가져다줄 정보기술(IT)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84년 일본식 컴퓨터 운영체제인 ‘트론(TRON·The Realtime Operating System Nucleus)’ 개발팀장을 맡으면서였다. 그러나 트론은 PC의 운영체제로서 세계 표준이 되는 데는 실패했다.

사카무라 교수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 같은 일반 운영체제를 버스에 비유한다면 트론은 경차”라고 설명했다. 속도가 빠르고 반도체에 심을 수 있는 게 장점이지만 크기가 작아 다양한 응용 프로그램을 돌릴 수는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트론은 전자기기의 크기가 작아지는 모바일 시대가 오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사카무라 교수는 “포스트PC시대에는 다양한 기기가 얼마나 싸고 안전하고 빨리 연결되느냐가 승부의 요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 트론을 활용해서 사물에 컴퓨터를 넣어 서로 연결시키는 ‘유비쿼터스’ 환경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1984년에 이미 ‘어디에나 컴퓨터를(everywhere computing)’이라는 개념을 처음 소개해 이 분야의 선구자가 됐다. 미국 제록스연구소의 마크 와이저가 ‘유비쿼터스’라는 이름을 붙여 유명해진 건 그보다 몇 년 후의 일이다.

취재팀은 사카무라 교수의 연구실에서 유비쿼터스를 잠시 체험할 수 있었다. 사카무라 교수가 손바닥만한 단말기를 테이블 위에 놓인 약병에 대자 단말기에서 ‘하루 세 번 복용하세요. 감기약과 함께 먹으면 안 됩니다’라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와인병에 대자 와인의 이력부터 함께 먹으면 좋은 음식까지 친절하게 소개가 됐다.

사카무라 교수는 “약병이나 포도주병에 붙어 있는 손톱 4분의 1만한 작은 칩이 초소형 컴퓨터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 칩은 전파를 받을 때 발생하는 유도전류로 전기를 공급받는다. 외부의 컴퓨터를 통해 정보를 수정할 수도 있다. 사카무라 교수는 “지금은 칩의 가격이 비싸지만 조만간 10원 정도로 떨어지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트론에 대해서는 MS도 관심이 많다. 얼마 전 MS는 파격적인 제안으로 사카무라 교수를 스카우트하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후 MS는 트론에 기반을 둔 소프트웨어와 반도체 규격을 만들어나가는 ‘T엔진 포럼’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9월의 일이다.

특별취재팀

이병기 배극인 홍석민 박형준기자(이상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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