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차지완]안철수 지지층, 차악(次惡) 선택의 괴로움

  • 동아일보

차지완 사회부 기자
차지완 사회부 기자
기성정치에 신물이 난다. 정파적 대결 때는 악다구니를 쓰면서도 사적(私的) 이익을 위해선 여야가 똘똘 뭉치는 모습에 염증을 느낀다. 선거 때마다 지역에 따라 나라가 양분되는 상황은 지겹다 못해 피곤하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라는 구분에도 짜증이 난다. 정치혐오증이라 불러도 좋다.

때마침 안철수가 대선후보로 등장했다. 기존 정치인과는 뭔가 다르게 보였다. 새 정치를 한다고 하니 믿음이 갔다. 그런데 그게 신기루였다. 새 정치를 할 능력이 되는지, 새 정치의 콘텐츠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따져볼 겨를도 없었다. 안철수의 대선후보 사퇴에 그를 열렬히 지지했던 상당수 유권자는 ‘멘붕’ 상태에 빠졌다. 이젠 누굴 찍어야 하나….

동아일보는 안철수 지지자의 표심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의 사퇴 직후인 지난달 24∼26일 그를 지지했던 전국 성인 남녀 50명을 심층 설문했다. 안철수를 ‘최선’이라고 여긴 사람들이 그가 대선 레이스에서 탈락한 상황에서 생각하는 ‘차선’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예상대로였다.

“기권하겠다. 이제 그 밥에 그 나물이다. 투표 자체를 하고 싶지 않다.” 서울 노원구에 사는 회사원 김모 씨(30·여)도 정치혐오증에 전염된 것 같았다. 박근혜 후보든 문재인 후보든 김 씨에겐 아무런 차이를 느끼게 하지 못한다. 그저 구태 정치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이런 유권자가 13명이나 됐다. “도저히 뽑을 사람이 없다” “기존 정당 인물은 호감 가는 사람이 없다” “이제 신경 끄고 싶다”고 말했다.

안타까운 건 안 전 후보 대신 문 후보나 박 후보에 투표하겠다는 나머지 유권자들의 표심이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차선(次善)이 아닌 ‘차악(次惡)’으로 선택했다고 답했다. 최선-차선-차악-최악이라는 네 가지 답 중에서 최선 차선이 없으니까 최악을 피하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다.

문 후보로 표심을 돌린 한 유권자는 “문재인이 못 미더운 것은 사실이지만 박근혜만 아니면 된다”고 말했다. 박 후보에게 기운 유권자는 “문재인 자체는 괜찮지만 그를 둘러싼 민주당 세력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차악으로 박근혜에게 표를 주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역대 선거를 치르면서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심리적 괴로움에 익숙하다.

안철수가 정말 대통령이 될 만한 인물이었는지는 논외로 치자. 그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은 정치권이 만들어 퍼뜨린 바이러스에 감염돼 기성 정치를 혐오하게 된 이들이다. 그런 유권자들을 박 후보와 문 후보 진영은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혈안이 돼 있다. 이번 대선의 승부처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박근혜 문재인 후보 진영은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자 ‘일단 흠집 내고 보자’식의 네거티브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상대 후보를 악마에 비유하는가 하면 유세전에서 개××라는 욕설까지 등장했다. 안 전 후보 지지층 가운데 상당수가 이런 네거티브전을 혐오한다. 그걸 알면서도 두 후보 진영은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고 있다. 코미디다. “결국 똑같은 사람들인데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을까요”라는 한모 씨(27·여)의 말이 맞았다.

역대 선거 때마다 막판으로 갈수록 부동층과 기권층을 끌어안기 위해 ‘최선이 아니면 차선, 이마저도 안 되면 차악이라도 제대로 뽑아야 한다’는 구호가 나온다. 맞는 말이긴 하다. 그렇더라도 차악에서 최악으로 기를 쓰고 내려가려는 두 후보 진영의 네거티브전은 유권자의 수준을 너무나도 얕잡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차지완 사회부 기자 cha@donga.com
#안철수#대선#차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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