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어제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대통령 선거 전에 개헌을 약속하고는 정작 집권 후에는 흐지부지해 오던 일을 우리는 수없이 봐왔다”며 “개헌은 대통령 선거 전에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또 “선거구제 변경과 분권의 헌법 개정을 통해 정치질서와 정치문화를 확실히 교체하겠다”며 “외교 안보 통일 등 대외 문제는 경험 있는 사람이 리드하고 경제·사회 문제를 총리가 할 수 있다면 협치(協治)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은 외교안보와 남북문제를 맡는 외치(外治) 대통령을 하고, 향후 대선에서 연대할 세력에 책임총리를 맡기는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대선 전에 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올 상반기에 조기 대선이 예상되는 가운데 대선 전 개헌은 물리적으로 쉽지 않다. 현 국회는 개헌안을 합의해 개헌 정족수인 재적 의원 3분의 2(200명) 이상의 찬성으로 국민투표에 부칠 만한 정치력도 없다. 이 때문에 반 전 총장도 16일 “대선 전 개헌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 반 전 총장이 ‘대선 전 개헌’으로 입장을 바꾼 데다 ‘4년 중임제’까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대선 전 개헌을 통해 차기 대통령의 임기는 2020년 4월 총선에 맞추되, 4년 연임이 가능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반 전 총장의 개헌안 발표는 개헌파인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나 김무성 바른정당 고문, 손학규 국민개혁주권연대 의장 등과 ‘개헌 연대’를 만들어 대선 전 개헌에 반대하는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와 경쟁하겠다는 것이다. 당장 정치권에서는 ‘반기문-김종인’ ‘반기문-김무성’ 러닝메이트 설이 나온다. 과거 친박계 핵심들이 흘리던 ‘반기문 대통령-친박 총리’ 설을 연상케 한다. 이것이 반 전 총장이 주장하는 ‘정치 교체’라면 실망스럽다. 반 전 총장은 “대통령도 인간이니까 한계가 있다”며 ‘외치 대통령’을 주창했으나 귀국 후 지지율이 답보 상태에 머물자 정치공학에 손을 벌린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어제 발표된 문화일보 여론조사에서 반 전 총장 지지율은 16.0%로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31.2%)의 반 토막이다. 양자 대결에선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이재명 경기 성남시장에게도 뒤졌다. 그럴수록 자신의 전공을 살려 외교안보 위기에 불안해하는 국민에 어필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 반 전 총장은 서해 북방한계선(NLL) 무력화 논란을 불러온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10·4 남북공동선언에 대한 평가를 묻는 질문에도 “역사적으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이러니 자신의 이념 성향에 대해 귀국 직후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했다가 ‘안보에선 확고한 보수주의자’라고 해도 설득력이 없다. 반 전 총장은 정치공학보다 자기희생과 비전으로 승부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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