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중국 前국가주석 백혈병 치료중 사망…향년 96세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30일 18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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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江澤民) 중국 전 국가주석.
장쩌민(江澤民) 중국 전 국가주석.
덩샤오핑(鄧小平)에 이어 중국의 제3세대 지도자로서 15년간 중국을 통치하며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이 30일 사망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이날 장쩌민이 백혈병 등으로 인해 상하이에서 치료를 받다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향년 96세.

장쩌민은 통치 기간 중 공산당 총서기(1989~2002년),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1989~2004년), 국가주석(1993~2002년)으로 당·정·군을 장악했다. 공산당 파벌인 상하이방(上海幇·상하이 출신 정·재계 인사)의 수장이었다.

그는 상하이 당 서기 시절인 1989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 때 학생들을 옹호했다가 축출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의 후임으로 하루아침에 중국 정치 중앙 무대에 등장했다. 덩샤오핑은 중국 정부의 무력 진압을 지지했던 장쩌민에게 그해 5월 총서기 자리를 제안했다. 장쩌민이 웃날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고 회고할 정도로 갑작스러웠다.

다음달인 6월 총서기로 정식 선출된 장쩌민은 처음에는 덩샤오핑의 가려 실권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톈안먼 시위에 대해 “일말의 관용도 없다”며 강하게 탄압하면서 권력을 강화해 갔다. 그해 12월 당 중앙군사위 주석에 올랐다. 1992년 덩샤오핑이 사실상 은퇴한뒤 1994년 국가주석에까지 오르며 권력을 장악했다.

장쩌민은 정부에 대한 공산당의 통제를 강화해 톈안먼 시위와 구 소련 몰락으로 위기를 맞았던 중국 내부 정치를 안정시키면서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의 이런 통치 방식은 ‘신(新)권위주의’ ‘개발독재’ 등으로 불렸다.

장쩌민 임기 동안 중국은 매년 평균 8%의 경제성장률을 지속하면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전환을 계속했다. 국가가 100% 소유하고 있던 국영기업의 지분을 일부 민간과 외국인에게 매각하는 등 시장경제 요소가 증가하는 구조개혁이 진행됐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은 1997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 2001년 베이징(北京) 올림픽 개최권(2008년) 획득 등 세계 무대로 진출했다.

미국 백악관에서 장쩌민(왼쪽)과 빌 클린턴. 1997.10.29 AP=뉴시스
미국 백악관에서 장쩌민(왼쪽)과 빌 클린턴. 1997.10.29 AP=뉴시스
홍콩 반환(1997년) 마카오 반환(1999년)도 일국양제에 대한 존중을 표시한 장쩌민 임기 때 이뤄졌다. 1997년 미국 국민 방문고 19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톈안먼 사태 이후 냉랭했던 미중관계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2002년 중국 공산당 헌장에 삽입된 장쩌민의 3개대표 사상은 개혁개방에 따라 주요 사회 세력으로 상정한 자본가와 지식을 포용해 공산당의 권력 기반을 자본가 계급으로 넓혀야 한다는 이론이다.

그는 중국 정치의 안정과 경제 성장을 이뤄낸 지도자로 평가되지만 2600여 명이 체포된 것으로 알려진 톈안먼 시위에 대한 폭력 진압, 1999년 수천 명을 체포한 것으로 알려진 파룬궁 탄압에 대한 비판이 많다. 또 장쩌민 통치 기간 중 중국이 경제성장에만 집중하면서 빈부 격차와 환경 파괴를 방치했고 중국은 이 두 가지 문제로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장쩌민은 2004년 중앙군사위 주석에서 물러난 뒤에도 후진타오(胡錦濤) 시대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시진핑(習近平) 시대에도 권력을 장악하려는 시 주석이 장쩌민의 상하이방 세력이 막후 권력투쟁을 벌여 왔다. 시 주석이 부패 퇴치를 내세워 사실상 상하이방 대부분 세력을 숙청했다. 장쩌민은 지난달 20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 불참했다.


베이징=김기용 특파원 k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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