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대 화학기업도 “공장 멈출 판”…러 가스차단에 허덕이는 독일 경제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8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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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복합위기’ 현장을 가다]獨 바스프 공장 현지 르포
“유럽 가스값 1년새 1000% 폭등”…가뭄까지 겹쳐 제조업 생산 타격
獨, 금융위기후 최악 경제난 직면…“한국도 특정국 수입의존 줄여야”

가뭄에 바닥 드러낸 라인강… ‘에너지 복합위기’ 17일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에서 수주간 이어진 
가뭄으로 라인강 바닥이 드러나 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은 러시아 천연가스 공급 감소와 극심한 가뭄이 겹쳐 ‘에너지 복합위기’를 
맞았다. 세계 최대 화학기업 바스프 등 주요 제조업 공장의 가동률이 떨어지면서 독일에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경제난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뒤셀도르프=신화 뉴시스
가뭄에 바닥 드러낸 라인강… ‘에너지 복합위기’ 17일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에서 수주간 이어진 가뭄으로 라인강 바닥이 드러나 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은 러시아 천연가스 공급 감소와 극심한 가뭄이 겹쳐 ‘에너지 복합위기’를 맞았다. 세계 최대 화학기업 바스프 등 주요 제조업 공장의 가동률이 떨어지면서 독일에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경제난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뒤셀도르프=신화 뉴시스
루트비히스하펜·만하임·바르샤바·파리=조은아 특파원
루트비히스하펜·만하임·바르샤바·파리=조은아 특파원
“천연가스 공급이 줄면 우린 ‘이중 타격’을 받습니다. 에너지원이 부족해질 뿐 아니라 제조업체들이 의료용품 등 여러 제품 생산을 줄일 수밖에 없어요.”

16일(현지 시간) 독일 서부 라인란트팔츠주 루트비히스하펜의 세계 최대 화학기업 바스프 공장. 다니엘라 레헨베르거 홍보담당자는 “가스는 여러 제품의 핵심 원료”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러시아의 가스 공급 차단으로 독일 경제를 떠받치는 제조업이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면적이 10km²에 달하는 바스프 공장은 유럽에 공급하는 천연가스 관련 제품의 77%를 생산한다. 공장 단지엔 화장품, 의료용품, 세제 등 여러 제조사의 물류 트럭 수십 대가 오갔다.

하지만 이곳엔 언제라도 가동이 중단돼 공장이 폐쇄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회사 관계자는 “이미 가스 공급이 지난달보다 약 50% 줄어 생산 가동 속도가 느려졌다”며 “공급이 수요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면 공장을 닫아야 한다”고 말했다. 주요 화학품을 생산하는 바스프는 지난달 암모니아 생산을 줄였다. 내년 암모니아를 원료로 쓰는 비료 수급에 차질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러시아는 지난달 독일을 통해 유럽으로 가는 노르트스트림 가스관을 잠갔다가 재개한 뒤 공급량을 기존의 절반으로 줄였다.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은 31일∼다음 달 2일 유지 보수를 이유로 유럽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중단한다고 19일 밝혀 에너지 차단에 대한 공포가 커지고 있다.

여기에 최근 극심한 가뭄까지 덮치자 바스프가 있는 일대 공장들은 공업용수 부족으로 공장 가동률이 더욱 떨어졌다. 원자재를 운반하는 선박 통행량도 기존 가용 규모의 25% 수준으로 감소했다. 독일에선 가스 공급 위기가 고물가를 자극하고 경제 활동을 위축시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경제난에 직면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유럽의 천연가스 가격은 22일 네덜란드 TTF 천연가스 선물 기준 MWh(메가와트시)당 장중 295유로(약 39만 원)까지 올랐다. 1년 전에 비해 무려 1000% 치솟았다. 전기요금이 급등해 프랑스와 영국의 철강업체들도 공장 폐쇄를 검토하고 있다.

에너지값 상승으로 세계 5위 에너지 수입국 한국도 타격을 피할 수 없다. 파티흐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본보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한국처럼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특정 국가 수입 의존도를 줄이고 원전과 신재생에너지를 활용해야 에너지 안보를 강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獨시민들 “가스 부족 걱정할 줄이야… 겨울 요금 급등땐 폭동 날 것”



“난방비 연말엔 두 배로 뛸 수도…가스공급 중단 푸틴, 선 넘었다”
탈탄소 상징 지역 석탄발전 늘려…가뭄-물류 차질에 석탄값도 들썩
자원 대국들 ‘에너지 보호주의’ 강화…韓, 자원확보 외교노력 더 중요해져


“독일처럼 발전된 나라에서 겨울철 가스 부족을 걱정하다니, 비현실적이에요. 제3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겨울에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 폭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16일(현지 시간) 독일 만하임에서 한국전력처럼 에너지를 공급하는 에너지기업 MVV의 아네벨레 파이트 씨는 “우린 아무도 겪어 보지 못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며 이같이 토로했다. 겨울철 가스비 급등이 예고돼 비상이 걸린 이 회사는 고객을 대상으로 ‘에너지 절약’ 웹세미나를 열고, 15일부터 10월 말까지 에너지 사용량을 일정 수준 이상 줄인 고객에게 최대 160유로(약 21만 원)를 환급해 주는 인센티브 제도를 시작했다.

독일 시민들은 에너지 요금과 그에 따른 물가 급등에 언성을 높였다. 만하임 도심에서 만난 은퇴자 디츠 씨는 “연간 난방비가 예년 800유로(약 107만 원)였는데 연말에 1600유로로 뛸 것 같다”며 “(독일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줄인) 블라디미르 푸틴이 선을 넘었다”고 했다. 만하임에서 운송업을 하는 엠므레 씨는 “가스 값이 최근 20% 오른 것 같다”며 “이건 합법을 가장한 독일 정부의 도둑질”이라고 불만을 내비쳤다.

러시아의 가스 공급 중단 직격탄을 맞은 독일은 겨울철 난방비 폭등에 긴장하고 있다. 가스가 귀해지자 탈탄소 선도국인 독일은 오히려 가스 대신 석탄발전을 늘렸다. 가스 값, 석탄 값이 치솟으며 제조기업들의 부담이 커지자 독일 경제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상황으로 침체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유럽의 경제대국 독일이 위기에 처하자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경제 타격을 대비하고 있다.

○ 가스 대신 선택한 석탄마저 가뭄에 공급 차질
탈탄소에 적극적이던 독일 정부는 가스가 부족해지자 지난해 12월 운영을 중단한 니더작센 지역 화력발전소를 내년 4월까지 가동하기로 결정하는 등 ‘탈탄소 유턴’까지 꾀하고 있다.

만하임은 과거 탄광 마을을 폐쇄하고 탄소 생산을 줄일 정도로 탈탄소를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이젠 시민들도 석탄 난방을 택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22년을 거주한 위르겐 가이어 씨는 “화력발전소가 빨리 퇴출돼 좋았는데 이젠 모든 상황이 불안해 화력발전을 할 수밖에 없다”며 “석탄이 원전보다 덜 위험하다”고 했다.

하지만 유럽 전역을 덮친 가뭄에 석탄 공급마저 어려움에 처했다. 15일 찾은 만하임 GKM 화력발전소에선 크레인이 선박에 실려 온 석탄을 공장 안으로 퍼 나르고 있었다. 주변 라인강 외곽이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내거나 수위가 낮아져 선박을 통한 석탄 운반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날도 운송 선박이 붐볐던 과거와 달리 석탄을 싣고 온 선박이 한두 척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딘 기저 GKM 홍보 담당자는 “물 부족과 그에 따른 화물 운송 차질로 (화력)발전에 지장이 있을 수 있다”며 “올겨울 외국에서 석탄을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독일 만하임의 GKM 화력발전소 인근 라인강이 가뭄으로 예전에 비해 수위가 줄었다.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감축으로 가스 부족 사태에 직면한 독일은 화력발전으로 눈을 돌렸지만 가뭄으로 선박을 통한 석탄 물류마저 차질을 빚고 있다. 만하임=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독일 만하임의 GKM 화력발전소 인근 라인강이 가뭄으로 예전에 비해 수위가 줄었다.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감축으로 가스 부족 사태에 직면한 독일은 화력발전으로 눈을 돌렸지만 가뭄으로 선박을 통한 석탄 물류마저 차질을 빚고 있다. 만하임=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유럽 가스 가격이 1년 만에 1000% 급등한 가운데 국제 석탄 가격도 치솟고 있다. 미국 리서치기업 바차트에 따르면 22일 런던ICE거래소에서 9월물 선물 가격은 452달러로 2021년 7월 이후 최고치를 경신했다.

○ 세계 5위 에너지 수입국 韓에 영향 불가피
가격이 요동치고 수급이 불안해지자 자원 부국들은 ‘에너지 보호주의’를 강화하는 조짐이다. 노르웨이는 수력발전이 가뭄으로 차질을 빚자 자국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해 수출 중단을 검토하고 있다. 호주도 아시아 대신 유럽으로의 가스 수출을 늘리고 있는 와중에 내년부터 수출 규제를 강화할지 검토하고 있다. 프랑스는 에너지 안보를 이유로 원전을 운영하는 EDF를 국영화해 재원을 쏟아붓고 있다.

각국의 에너지 보호주의와 확보 전쟁이 가시화되면서 세계 5위 에너지 수입국인 한국은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주요 에너지 수입 계약은 장기 계약이라 당장 수급이 부족하지 않지만 가격이 급등하면 국내 에너지 값은 물론이고 물가를 더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고경석 주프랑크푸르트 총영사는 “유럽의 에너지 위기에서 한국도 에너지 수입처 다변화가 중요함을 확인했다”며 “에너지 자원 확보를 위한 외교적 노력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했다.

유럽의 전문가들은 한국이 유럽 자원 부국들과 전략적 협력을 맺을 여지가 있다고 조언했다. 한국 정부는 체코,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와 원전 협력을 타진하고 있다.

한국의 투자가 늘고 있는 폴란드는 원전 건설, 신재생에너지 발전 분야에서 한국에 협력을 제안하고 있다. 폴란드 경제부총리 출신인 야누시 피에호친스키 폴란드아시아상공인회 회장은 기자와 만나 “폴란드는 유럽 석탄의 93%를 생산하고 가스 매장량도 상당하기 때문에 한국 등 기술력을 갖춘 해외 자본과 협력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에너지 90%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 원전 부활-에너지 안보에 매우 중요”


비롤 국제에너지기구 사무총장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여야 에너지 안보를 지킬 수 있습니다.”

파티흐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사진)은 21일(현지 시간) 본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한국처럼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공급원을 다양화하는 게 중요하다며 이같이 조언했다.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의존하다가 심각한 가스 수급 대란을 겪고 있듯 특정 국가나 공급업체에서만 에너지를 수입하면 위험이 크다는 설명이다. 비롤 총장은 2015년부터 7년째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IEA 수장을 맡고 있다.

비롤 총장은 전 세계적 에너지 대란과 관련해 “모든 국가들이 에너지 공급이 중단됐을 경우 취할 모든 조치와 절차를 아우르는 강력한 비상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러시아의 가스 공급 감축 조치 이후 이달부터 내년 3월까지 천연가스 소비를 15% 줄이기로 하고 비상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비롤 총장은 “탄소 배출이 적은 기존 에너지원으로 에너지 생산을 유지하고, 비축 가스 공동 이용을 위한 투자를 해야 한다”며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고 재생 에너지 발전도 촉진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한국 정부의 ‘탈원전 폐기’ 정책을 에너지 안보를 강화할 방법으로 봤다. 비롤 총장은 “한국에선 원전의 부활이 에너지 안보와 기후변화 목표를 달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며 “한국은 에너지 수요의 9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전력 시스템은 전적으로 수입되는 석탄과 천연가스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상 기후, 청정에너지 가동 중단, 사이버 공격을 에너지 시장의 새로운 위협으로 언급했다. 특히 이상 기후는 최근 에너지 공급에 큰 위험 요소로 떠올랐다.

비롤 총장은 “유럽의 액화천연가스(LNG) 수요 증가는 2025년까지 전 세계 LNG 수요 순성장의 60% 이상을 차지할 것”이라며 “겨울 난방 수요 증가에 따라 가스가 더욱 부족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이어 “세계 석탄 소비는 올해 약간 증가해 2013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할 것”이라며 “이는 청정에너지 전환 기조를 고려할 때 놀라운 일”이라고 분석했다. 세계 석유 수요도 올해 일간 1억200만 배럴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또 “내년 초에는 최대 일간 200만 배럴의 러시아 석유 공급이 중단될 수 있어 석유가 더 부족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루트비히스하펜·만하임·바르샤바·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글로벌 복합위기’ 현장을 가다#독일#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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