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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국제

증오 범죄 총격범들의 돌림노래…‘백인 대체론’[김수현의 세계 한 조각]

입력 2022-05-29 09:00업데이트 2022-05-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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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인 15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주 버팔로시 ‘톱스프렌들리’ 슈퍼마켓 앞. 사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시민들이 놓아둔 꽃다발 앞에 한 노부부가 서로를 껴안으며 슬퍼하고 있다. 버팔로=AP 뉴시스



“이 글을 통해 알리고 싶은 것 하나가 있다면 바로 백인 출생률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이다.”

12일 밤, 18세 백인 페이턴 겐드런은 ‘구글 닥스’에 180페이지 분량의 수상한 문서가 올립니다. 그는 이어갑니다. “내 개인적 인생과 경험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내 공동체, 내 사람, 내 문화, 내 인종을 지키고 이들을 섬기려는 백인일 뿐이다.”

그리고 이틀 뒤 미국 뉴욕주 버펄로시 동부 킹슬리 ‘톱스프렌들리’ 슈퍼마켓.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거주하는, 반경 4마일(약 6.4km) 내 유일한 마트인 이곳에서 총격 소리가 연속으로 울려 퍼집니다.


이날 겐드런은 마트로 들어가 50발 이상 총을 쏴 10명을 살해합니다. 3명이 다쳤습니다. 사상자 가운데 부상자 2명을 뺀 나머지 사람은 모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습니다.

14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주 버팔로시 법정에서 총기 난사범 페이턴 겐드런(오른쪽)이 법원의 심문을 받고 있다. 이날 법정에서 그는 “혐의를 이해한다”는 한 마디만 남겼다. 버팔로=AP 뉴시스


이날 1급살인 혐의로 기소된 겐드런은 법정에서 이렇게 내뱉습니다. “혐의를 이해합니다(I understand my charges)”. 혐의를 인정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현재 보석 없이 구금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겐드런의 위 글과 소름 돋을 만큼 비슷한 ‘문서’가 있습니다. 2019년 뉴질랜드 남섬 크라이스트처치 이슬람 사원 두 곳에서 51명을 살해한 총격범의 선언문입니다. 호주 국적 브렌튼 테런트는 범행 직전 선언문을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에게 이메일로 보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서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출생률이다(It‘s the birthrates.)

출생률이다(It’s the birthrates.)

출생률이다(It‘s the birthrates.)’


‘이 글에서 당신이 기억했으면 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출생률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해 1월 6일(현지 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발생한 의회 습격 사견.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한 후 부정 선거 의혹을 제기한 것을 계기로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회로 몰려 점거했다. 워싱턴=AP 뉴시스


두 문서 모두 백인의 낮은 출생률을 지적하며 시작합니다. 줄어드는 백인을 대체하기 위해 비(非)백인, 비(非)유럽인이 밀려왔고 유례없는 ‘침공(invasion)’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대체되고 있다.” 두 문서 모두 반복합니다.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백인이 대체되고 있다, 따라서 출생률이 복구될 때까지 침입자를 이 땅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두 문서의 핵심은 한마디로 ‘(백인) 생존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살인범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백인 청소(White Genocide)’


두 살인범이 무서울 정도로 같은 극단적 논리를 외쳐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들의 주장이 대체이론(Replacement Theory)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기자는 이 이론은 터무니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며 어떠한 차별적 폭력도 용납될 수 없다는 점을 먼저 밝힙니다.

프랑스 극우 민족주의 철학자 르노 카뮈(왼쪽)과 그의 2012년作 ‘대전환(Le Grand Remplacement).’ 르노 카뮈 페이스북 캡처


대체이론은 프랑스 극우 민족주의 철학자 르노 카뮈가 2012년 쓴 책 ‘대전환(Le Grand Remplacement)’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모든 유럽 국가가 인구학적, 문화적으로 비백인 인종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우려합니다. “백인들이 위협받고 있다!”는 음모론의 돌림노래 격입니다.

대체이론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비(非)백인종이 의도적으로 백인 중심 국가로 이주해 자녀를 계속 낳으며 인구를 늘리고 있다. 둘째, 백인은 자신의 인종을 ‘약화하려는’ 의도적인 움직임 아래 점점 자녀 생산을 포기하고 있다. 성소수자 및 성적 다양성 지지와 백인 여성의 직업 활동 장려가 포함된 이 움직임으로 전통적인 백인 가족관은 무너지고 있다.

즉 인구통계학적으로 비백인 인구가 백인을 압도하는 ‘백인 청소(White genocide)’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15일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한 톱스프렌들리 마켓 인근에 장미꽃을 든 시민들이 모여 사망자들을 추모하고 인종 차별에 반대하기 위해 행진하고 있다. 버팔로=AP 뉴시스


대체이론 신봉자들은 이런 ‘음해’ 뒤에 정부와 대기업이 있다고 믿습니다.(겐드런 역시 ‘세계 엘리트’가 세상을 조작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줄어드는 백인을 대신해 세금을 내고 물건을 사줄 인구를 채우려고 의도적으로 이민자 유입을 허용했다는 겁니다. 유대인이 모든 걸 조종하고 있다는 반(反)유대주의 주장도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때로는 ‘출산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다며 백인 여성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돌아갑니다. 대체이론은 인종주의와 여성 혐오의 결합체입니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혐오


폭스뉴스 ‘터커 칼슨 투나잇’의 진행자 터커 칼슨. 17일 진행된 방송에서 그는 “민주당이 버팔로 총기 난사 사건을 계기로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을 공격했다”고 비판했다. 터커 칼슨 트위터 캡처


현재 미국에서 대체이론을 가장 큰 목소리로 외치는 사람으로는 보수 성향 폭스뉴스 진행자 터커 칼슨을 꼽을 수 있습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열성 ‘트럼프주의자’인 칼슨은 방송에서 “백인이 대체(replaced)되고 있다”는 말을 400번 이상 했다고 합니다. ‘민주당이 제3세계 순종적인(obedient) 유권자를 유입시켜 미국인 투표권을 훼손하고 있다’고도 했다고 합니다.

6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그린스버그에서 열린 미국 공화당 경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메맷 오즈 미국 공화당 경선 후보에 대한 지지 연설을 하고 있다. 그의 머리에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고 쓰인 빨간색 모자가 보인다. 그린스버그=AP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역시 미국 대중에게 ‘(우리가) 대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심어준 장본인입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미국과 멕시코 국경 문제를 두고 공공연하게 ‘이민 침공(immigration invasion)’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표현은 2019년 텍사스주 엘파소 월마트 총기 난사로 20명을 살해하고 26명을 다치게 한 범인 입에서 반복됩니다. “이것은 히스패닉계의 텍사스 침공(invasion)에 대한 대응이다.”

2017년 8월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 경찰서 주차장에서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가운데)이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 둘러 쌓여 맞고 있다. 이날 샬러츠빌 일대에서는 백인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유혈 시위가 발생했다. 샬러츠빌=AP 뉴시스


대체이론이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부상한 것은 2017년 버지니아주 ‘샬러츠빌 사태’입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를 비롯한 6000여 명이 샬러츠빌에 모여 “우리를 대체할 수 없다(You will not replace us)”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결국 사상자 20명을 내는 유혈 사태로 끝났습니다.

대체이론은 마치 돌림노래처럼 총기 난사 살해 피의자의 입을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8년 피츠버그 유대교 회당 학살(11명 사망), 2019년 엘파소 월마트 학살(20명 사망), 파웨이 유대교 회당 총격(1명 사망), 이번 버팔로 톱스프렌들리마켓 학살(10명 사망)까지 말이죠.

14일 버팔로 총기 난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민(왼쪽)과 24일 유벨디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어린이들 버팔로·유벨디=AP 뉴시스


이번 기사를 마무리하던 25일, 계속 울리는 속보 알림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 화면을 켰다 절망에 목이 메었습니다. 텍사스주 유벨디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14명, 그 다음은 18명, 마지막은 19명이었습니다. 교사 2분도 아이들을 지키다 사망했습니다. 오전에 한 아버지가 딸을 찾지 못해 결국 장례식장까지 왔다는 사연을 접했습니다. 퇴근하기 전, 그 아이가 결국 사망자 중 포함됐다는 보도를 확인했습니다.

14일, 그리고 24일에 벌어진 비극으로 사망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싶습니다. 이들은 지역사회에 헌신한 전직 경찰이었고, 세 살배기 아들 생일케이크를 사러 마트를 찾은 아버지였습니다. 이제 막 10살 생일이 지난 딸이었고, 목소리가 씩씩한 꼬마 농구팀의 마스코트였습니다.

부디 이런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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