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누가 미국 믿겠나” 아프간 참전했던 美 장병들 분노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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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아프간 철군 이후]현지인 아비규환 모습에 충격 받아
“우리도 트라우마에 내몰리게 될 것”
순직 군인 유족 “아버지 희생에 모욕”

“마치 칼날이 가슴을 찌르고 심장이 찢기는 것 같다.”

미국 해병대 소속으로 2년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됐던 닉 스테파노비치는 아프간 수도 카불이 탈레반에 넘어간 이틀 뒤인 17일(현지 시간) 미국 CBS뉴스 인터뷰에서 고통스러운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자신을 도왔던 현지인들을 걱정하며 “참전 용사들이 트라우마와 절망으로 내몰릴 것”이라고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전날 아프간 철군의 정당성을 알리는 대국민 연설에서 ‘더는 미군을 희생시킬 수 없다’고 했지만, 정작 참전 용사들은 이번 결정에 분노하고 있다고 미국 언론은 전했다.

20년간의 아프간전은 미국에 지긋지긋한 동시에 각별했다. 전쟁 초기에는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갓난아기였던 이들이 전쟁 막바지엔 군인으로 파병됐다. ‘세대를 이어온 전쟁’이란 말도 나온다. ‘제로 다크 서티’ ‘아웃포스트’ ‘워독’ 등 아프간전을 배경으로 한 미국 영화도 여럿이다. 참전 용사들은 부상과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아프간을 아꼈고 미국인들은 이들에게 존경을 표했다. 갑작스러운 미군 철수와 탈레반 정권의 재출현, 아프간 국민들의 탈출 아비규환은 이들에게 충격일 수밖에 없다.

19세이던 2002년 해병으로 아프간에 간 제이컵 파크스는 최근 미군 철수를 지켜본 뒤 “미국이 그만 포기하자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고 미 텍사스 지역 언론 크리스TV에 말했다. 그는 아프간에서 돌아온 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렸다면서 “우리가 힘들게 싸워 온 모든 것들이 일주일도 안 돼 무너졌다”고 했다.

오하이오, 오클라호마 등 미국 각지에서는 참전군인 단체를 중심으로 여론이 들끓고 있다. 밀워키 지역매체 CBS58은 “위스콘신 참전 용사들은 너무도 익숙한 지역(아프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며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고 있다”고 전했다. 전 육군 정보장교 샘 로저스는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다. 슬픔 분노 좌절을 느꼈다”고 말했다.

아프간 현지인들과 오랫동안 교류했던 참전 군인들은 앞으로의 상황을 걱정했다. 공군 기술병사로 아프간에 갔던 브라이언 르휴는 “미군이 주둔한 20년간 어린 소녀들은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아프간 최초의 여성 비행기 조종사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아프간 여성들은 미군이 오기 전인 2001년 이전과 같은 억압 속에 살아가야 한다”고 우려했다. 탈레반은 이슬람 율법을 내세워 여성의 교육과 사회 활동을 엄격히 제한한다.

2012년 아프간에서 근무한 육군 대위 더스틴 엘리아스는 자신을 도왔던 현지인 통역사와 최근 연락이 닿았다고 했다. 이 통역사는 현재 카불 외곽에서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 중이고 가족들은 탈레반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아스는 통역사의 안전을 걱정하며 “이제 누가 미국을 믿겠느냐”라고 물었다.

아프간에서 순직한 군인의 유가족들도 분개했다. 17일 CNN방송에 따르면 미군 특수부대원 제임스 옥스너는 아프간에 네 차례 파병됐다. 그는 마지막으로 파병됐을 때인 2005년 11월 15일 거리에서 폭탄이 터져 사망했다. 그의 아들 닉 옥스너는 “아버지는 아프간에서 하루 일과를 마치면 거리에서 현지 사람들과 둘러 앉아 대화하는 것을 즐겼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들을 사랑했고 그들도 아버지를 사랑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의 이번 철군은 아버지의 희생에 대한 모욕이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미군 편에 섰던 수천 명의 아프간 사람들을 걱정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다른 전쟁에 나설 때 아프간에서 했던 것처럼, 미국의 조력자들에게 또 등을 돌릴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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