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 뒤집어쓴 후보, 찢어진 벽보… 증오로 얼룩진 佛대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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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5일 앞두고 정치불신 높아져


아름다운 도시 파리가 대선 포스터로 흉물이 되어가고 있다. 17일(현지 시간) 파리 남서쪽 15구 구청 앞 포스터에는 극우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 후보 얼굴에 엑스표가 그려져 있었다. 파리 남쪽 번화가 몽파르나스 근처 도로변에 붙은 포스터는 11개 중 절반 이상이 찢겨 나갔다. 거리에서 만난 40대 줄리 씨는 “역대 최악의 선거다. 투표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선호하는 후보가 한 명 있지만 그에 대해 확신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1차 대선 투표일을 엿새 앞둔 이날, 지지율만 놓고 보면 프랑스 대선은 역대 어느 선거보다 흥미진진하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극우 르펜, 중도 ‘전진’의 에마뉘엘 마크롱, 극좌 연대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의 장뤼크 멜랑숑, 우파 공화당 프랑수아 피용 후보까지 1∼4위 후보의 지지율 격차가 3∼4%포인트에 불과할 정도로 박빙 승부가 펼쳐지고 있다.

프랑스 대선은 2007년과 2012년 투표율이 80%가 넘을 정도로 유럽 최고 수준의 열기를 자랑한다. 영국, 독일은 보통 60∼70% 선이다. 이런 박빙 승부에 투표율이 더 올라갈 만도 한데, 최근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정치연구센터는 23일 1차 투표율이 68%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예측 조사를 발표했다.

기성 정치에 대한 불만으로 우파 공화당과 좌파 사회당의 기존 양강 구도는 깨졌지만, 신진 후보들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극단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국민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게다가 후보들이 선거 운동 과정에서 정책 제시보다 상대 후보들의 스캔들만 부각하면서 역대 최악의 네거티브 선거라는 지적이 나온다. 토론을 사랑하는 ‘정치의 나라’ 프랑스에서 대선이 말라빠진 바게트처럼 국민의 외면을 받는 형국이다.

15일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에 따르면 프랑스 유권자의 81%가 이번 대선 캠페인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75%가 후보자들이 프랑스의 미래에 닥칠 일들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고 답했다.

국민 통합의 장이 되어야 할 대선은 상대 후보에 대한 증오로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피용은 지난달 스트라스부르 유세에서 한 청년이 던진 밀가루 봉지를 정통으로 맞고 온몸에 밀가루를 뒤집어썼다. 청년은 피용을 향해 “로비스트, 사기꾼”이라고 소리쳤다. 피용은 1월 경선에서 대세론을 형성하던 경쟁 후보(알랭 쥐페)의 과거 유죄 판결 경력을 거론하며 ‘깨끗한 손’을 모토로 대역전극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당선 직후 가족을 허위로 보좌관으로 채용해 세비를 횡령하고, 고가의 정장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부패한 기성 정당의 이미지를 고착화했다.

기성 정치를 뒤엎겠다며 ‘혁명’이라는 책을 들고 지난해 11월 출사표를 낸 40세의 마크롱도 20% 중반대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좌도 우도 아닌 중도를 표방하고 나섰지만 모호한 수사만 늘어놓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마크롱은 지난달 파리 농업박람회에 참석했다가 농민이 던진 계란을 얼굴에 정면으로 맞았다.

르펜도 유럽의회 경호원을 보좌관으로 허위 등록했다는 의혹이 겹치면서 프랑스 대선을 ‘정책 검증의 장’이 아닌 ‘스캔들 대선’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르몽드는 한 누리꾼의 말을 인용해 “마크롱은 계란을 맞았고 피용은 밀가루 세례를 받았으니 이제 누군가 르펜에게 우유를 뿌리면 크레페를 만들 수 있겠다”고 조롱했다고 전했다.

이러다 보니 유권자들은 속 시원한 주장을 펼치는 극단주의로 눈을 돌렸다. 시앙스포의 마르시알 푸코 정치연구센터 디렉터는 “기성 정치에 불만이 쌓여 극단주의만은 막아야 한다는 전략적 투표가 먹히지 않고 있다”며 “결선 투표에서 르펜이 올라가도 르펜을 막기 위해 다른 당 후보를 찍자는 주장이 안 먹힐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극우 성향의 르펜, 극좌 성향의 멜랑숑 후보는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탈퇴, 국경 폐쇄, 고소득자 90% 세금 부과 등 기존 시스템의 틀을 깨는 공약을 들고 나왔다. 이런 극단주의는 서로에 대한 증오에 불을 붙이고 있다. 르펜의 연설장마다 반대자들의 시위가 이어지더니 13일에는 르펜의 파리 선거대책본부가 입주한 건물에 외국인 혐오에 반대하는 단체의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까지 발생했다.

당선 이후도 문제다. 피용을 제외하고 르펜이 소속된 FN은 의원이 2명뿐이며 마크롱과 멜랑숑이 소속된 정당은 단 한 명도 없어 의회와의 관계도 험난할 것으로 예상된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파리#대선#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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