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획]백악관 안들어가겠다는 ‘아웃사이더’ 영부인, 새 역사 쓸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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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숨은 권력 멜라니아

10만 달러짜리 디오르 드레스를 입고 24세 연상의 도널드 트럼프와 결혼식을 올리는 멜라니아 트럼프. 사진 출처 셀러브리티브라이드가이드
10만 달러짜리 디오르 드레스를 입고 24세 연상의 도널드 트럼프와 결혼식을 올리는 멜라니아 트럼프. 사진 출처 셀러브리티브라이드가이드
 ‘역사를 완성하는 숨은 권력.’

 미국 유명 작가 케이티 마턴은 ‘대통령 부인(퍼스트레이디)’을 이렇게 정의했다. 남편인 대통령을 내조할 뿐 아니라 실책을 짚어주는 역할도 해야 하는 최측근이기 때문이다. 마턴은 “역할을 다하지 못한 대통령 부인은 남편만 망치는 게 아니라 나라까지 망친다”고 말한다.

 8일(현지 시간)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내년 1월 취임식이 열리면 트럼프의 아내 멜라니아 트럼프(46)는 대통령 부인이 된다. 모델 출신, 이민자, 세 번째 부인…. 그녀를 둘러싼 다양한 수식어들은 과거 미 국민들이 지켜봤던 대통령 부인의 전형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취임식 후에도 남편을 따라 백악관에 들어가지 않고 뉴욕 맨해튼의 펜트하우스에 머물겠다는 결정도 과거 대통령 부인들과 다르다.

 마턴은 멜라니아에 대해 “역사상 가장 준비되지 못한 퍼스트레이디”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과연 그녀는 엘리노어 루스벨트(32대), 바버라 부시(41대) 같은 존경받는 대통령 부인의 계보를 이을 수 있을까. 워싱턴 아웃사이더인 트럼프의 당선 충격에 이어 대통령 부인과는 동떨어진 삶의 궤적을 그려 왔던 멜라니아를 퍼스트레이디로 맞이하게 된 국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슬로베니아 ‘집순이’

 멜라니아는 1970년 슬로베니아 남동부 지방에서 태어났다. 26세 때 미 뉴욕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고국에서 지냈지만 그 시절 얘기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남성잡지 GQ에 따르면 디자이너를 꿈꿨던 멜라니아는 꾸미는 것을 좋아해 고교 때부터 마스카라와 볼 터치, 파운데이션을 매일 바르고 다녔다. 한편으론 ‘집순이(homebody·집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라 불릴 정도로 얌전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동창 미르야나 옐란치치는 “멜라니아는 어떤 상황에서도 욕을 하지 않는 조용한 아이였다”고 말했다. 또 다른 친구 페트라 세데이도 “멜라니아는 파티장이나 디스코텍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슬로베니아의 가십 전문 칼럼니스트 보얀 포자르는 2월 발간된 ‘멜라니아 트럼프: 그녀의 속사정’에서 그녀의 숨겨진 가족사를 들춰냈다. 책에 따르면 멜라니아 모친은 33년간 아동복 회사에서 옷에 무늬를 넣는 패턴 작업공으로 일했다. “내 어머니는 디자이너였다”던 멜라니아의 발언과는 한참 먼 사실이다. ‘배다른 남매’도 있었다. 자동차 판매원인 아버지는 결혼 전 애인과 관계에서 아들을 낳았지만 존재를 부정했다가 친자 확인 소송을 당했다.

 멜라니아는 아버지와 관련된 이런 사실을 부인해 오다 법정 문서가 공개된 뒤에야 “수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생활을 지켜 달라”고 태도를 바꿨다. 주간잡지 뉴요커는 “삶의 단순한 정보까지 허풍떠는 모습이 트럼프와 비슷하다”고 비꼬았다.

재벌과 모델의 첫 만남

 멜라니아는 고등학생이던 1987년 사진작가 스타네 예르코의 눈에 띄어 모델의 길을 걷는다. 모델이 되기로 한 이 결정은 ‘슬로베니아 집순이’가 뉴욕 부동산 재벌 트럼프와 만나는 계기가 됐다.

 1996년 뉴욕에서 모델 활동을 시작한 멜라니아는 2년 뒤 패션위크 파티장에서 트럼프와 마주친다. 당시 트럼프는 두 번째 부인과 별거 중이었고 파티엔 여자 친구와 함께 온 상태였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저 여성(멜라니아)은 누구냐”고 물었고, 그녀에게 다가가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며 ‘작업’을 걸었다.

 트럼프의 여성 편력을 익히 들었던 멜라니아는 여러 번 거절했다고 한다. 그 대신 트럼프의 자택과 사무실 전화번호를 받았다. 멜라니아는 “트럼프의 행동을 떠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밝혔다. 화보 촬영을 다녀온 멜라니아는 트럼프에게 연락해 첫 데이트를 했다. 장소는 뉴욕의 핫 플레이스였던 ‘뭄바(Moomba)’였다.

 두 사람은 2005년 트럼프 소유의 리조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멜라니아는 크리스털 장식이 1500개나 붙은 명품 브랜드 디오르의 드레스를 입고 식장에 나타났다. 드레스 값은 10만 달러로 완성하기까지 550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린 그녀는 이듬해 트럼프의 막내아들 배런을 출산한다.

 남편이 대통령 후보가 되자 그녀의 출신을 둘러싼 비난 여론은 극에 달했다. 24세 많은 부동산 재벌의 세 번째 부인이 된 그녀에겐 ‘골드디거(gold-digger·돈을 좇아 결혼하는 여자)’라는 비웃음이 쏟아졌다. 지성미라곤 없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뒤따랐다.

 멜라니아는 선거 기간에 “슬로베니아에서 건설·디자인 학위를 땄다”며 이런 비판에 맞섰다. 하지만 이는 거짓으로 밝혀졌다. 그는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대에 진학했지만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모델 훈련을 받기 위해 1학년 때 중퇴했다. 결과적으로 미국 사회에선 보기 드문 ‘고졸 퍼스트레이디’가 되는 셈이다.

대통령 부인의 새 역사 쓸까

 뉴욕타임스 기자는 1999년 멜라니아에게 “혹시 남자친구(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면 어떤 퍼스트레이디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 당시엔 트럼프가 대선 출마를 할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기에 그녀는 별 고민 없이 “재클린 케네디(35대)나 베티 포드(38대)처럼 되고 싶다”고 답했다.

 미국의 대통령 부인은 △내조형 △커리어형 △패셔니스타형으로 나뉜다. 순종적인 성향을 갖고 내조에만 전념하는 내조형은 주로 공화당 정권의 부인들이었다. 마미 아이젠하워(34대), 낸시 레이건(40대) 등이 대표적이다. 커리어형은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남편만큼이나 정책 결정과 외교에 적극적으로 나선 유형이다. 이번 대선에서 참패한 힐러리 클린턴(42대)과 엘리노어 루스벨트 같은 민주당 정권 부인들이 여기 속한다.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았던 재키 케네디와 미셸 오바마(44대)는 패셔니스타형 퍼스트레이디로 분류된다.

 3가지 분류법에 따르면 멜라니아는 패셔니스타형에 가깝다. 선거 기간 중 입고 나온 핑크색 리본 블라우스, 흰색 점프슈트, 붉은색 원피스 등은 화제가 됐다. 중년의 나이에도 뛰어난 자태를 뽐내며 다양한 의상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포함한 5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 향후 정상외교 무대에서 두각을 드러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트럼프의 폭주 기관차 같은 행보를 제어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다.

 멜라니아는 루이자 애덤스(6대)에 이어 외국에서 태어난 두 번째 미국 대통령 부인이다. 영국에서 태어난 루이자는 품격 있는 자태로 백악관 안주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뉴요커’는 “루이자의 취미는 하프 연주와 드라마 각본 쓰기였지만 멜라니아의 취미는 잡지 읽기와 필라테스”라며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평가했다.

 정책적인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것도 단점으로 꼽힌다. 멜라니아는 “퍼스트레이디가 된다면 온라인 욕설과 비방을 없애는 캠페인에 주력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밝혔다. 하지만 소아비만 퇴치와 여성 교육에 대한 명확한 메시지를 갖고 운동을 펼쳤던 직전 대통령 부인 미셸에 비하면 비전이 뚜렷하지 않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백악관 입성 거부한 퍼스트레이디

 내년 1월 20일 취임식 후 트럼프 당선인은 백악관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멜라니아는 10세짜리 아들 배런이 4학년을 마칠 때까지 뉴욕 트럼프타워에 남겠다는 뜻을 밝혔다. 배런은 연간 학비 4만 달러가 넘는 사립학교에 다닌다. 정권 인수위원회 관계자는 “4학년을 끝낸 뒤 백악관에 들어갈 수도 있지만 확정된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미 역사상 대통령 부인이 백악관을 벗어난 사례는 거의 없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부인이 관저가 완성되지 않아 입성 시기를 미뤘고 윌리엄 헨리 해리슨(9대)의 부인이 취임 전 중병에 걸려 며느리를 대신 들여보낸 게 예외라면 예외다. 칼럼니스트 대니얼 멘덜슨은 “백악관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결정은 수도 워싱턴을 무시하는 처사이고 나아가 정부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자녀 교육을 핑계로 백악관의 전통을 어기려는 멜라니아의 태도를 꼬집은 것이다. 직전 대통령 부인 미셸 오바마에게도 백악관 입성 당시 각각 7세, 10세짜리 딸이 있었지만 시카고에서 워싱턴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미국 퍼스트레이디는 헌법에 규정된 의무도, 월급도 없는 자리다. 하지만 대통령 배우자로서 백악관 생활을 함께한다는 점에서 담당 비서 1명과 관련 직원 4, 5명을 지원받는다. 최근엔 대통령 부인을 위한 연설담당관도 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행정부 고문이던 애니타 맥브라이드는 “백악관이 새 대통령 가족에게 맞추지만 대통령 가족도 백악관에 맞춰 가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 부인의 전형적 모습을 깨뜨린 멜라니아가 어떻게 백악관에 맞춰 갈지 미 국민들은 기대 반, 우려 반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김수연기자 s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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