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촌을 부국으로…‘싱가포르 국부’ 리콴유 前 총리의 생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3일 15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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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국민소득 400달러에 불과했던 가난한 어촌 마을을 5만 달러가 넘는 부강한 나라로 탈바꿈시킨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가 영면한 올해는 싱가포르 독립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리 전 총리는 박정희(한국) 장제스(대만) 덩샤오핑(중국)과 함께 아시아의 도약을 이끈 아시아 1세대 창업형 지도자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지난해 싱가포르 1인당 GDP는 5만6113달러로 세계 8위, 아시아 1위이며, 세계경제포럼 (WEF) 조사 국가경쟁력은 세계 2위, 국제투명성기구 조사 국가청렴도는 세계 5위이다. 이런 싱가포르를 있게 한 주인공이 리콴유라는 데에 이견은 없다.

1923년 싱가포르로 이주한 중국계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나 풍족하게 자란 리콴유는 어릴 적부터 수재소리를 들으며 1935년 명문 래플스학교에 수석 입학 수석 졸업을 한다. 하지만 곧 2차 대전이 터지고 일본군이 고향을 점령하면서 일본군 선전 정보부에서 번역 일을 하거나 고무풀 장사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야 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일본군 치하를 겪으며 권력을 차지하고 사람을 다스리는 정치의 속성을 몸으로 익혔다. 정부가 왜 필요한지 깨달은 시기이기도 했다”고 적었다.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 유학을 떠나 런던 정경대·케임브리지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해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영국의 선진 문물과 학문과 인종차별 등을 경험하면서 “내 나라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다.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1950년 고국에 돌아온 그는 노동 전문변호사로 영국 측 사용자들과 아시아계 노동자들 사이 쟁의를 잇따라 타결시키면서 동족의 이익을 대변해야겠다는 열망을 가졌고 마침내 서른한 살 때 정치에 뛰어들어 1954년 창립한 ‘인민행동당’ 사무총장직을 맡았다.

5년 뒤인 1959년 싱가포르가 자치권을 얻어 낸 뒤 실시한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이 51석 중 43석을 휩쓸며 압승하자 리콴유는 서른여섯 나이에 첫 총리가 된다. 이후 1965년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독립한 싱가포르 초대 총리로 취임해 1990년 퇴임할 때까지 장장 26년간 총리로 재직했다. 자치정부 시절까지 합하면 무려 31년 동안 총리로 재직해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한 총리로 기록됐다. 독립 당시 400달러 수준이었던 싱가포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그가 총리직에서 퇴직한 1990년에 1만2750달러를 달성했다.

리콴유는 서울시만한 면적에 자원도 인구도 부족한 도시국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 1963년 국민투표를 통해 말레이 연방에 가입하지만 연방의 맹주 말레이시아와 충돌을 빚다 2년 만에 탈퇴한다. 리콴유가 정치노선의 핵심키워드로 ‘실용주의’를 갖게 된 배경이 되는 일이었다.

그는 이후 특정 이념에 경도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반식민주의-온건사회주의-강경 반공주의를 넘나들면서 싱가포르를 통치했다. 2007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싱가포르의 이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이념에서 자유롭다. 잘 작동한다면 시도해라. 좋다면 계속해라. 작동하지 않는다면 던져버리고 다른 것을 시도해라. 이게 이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집권 후 재정 안정화, 서민주택 보급, 공직비리조사국 설치, 해외투자 유치 등의 정책을 시행했다. 개발도상국이 소홀히 하기 쉬운 환경보호에도 힘써 싱가포르를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 중 하나로 만들었다.

미래를 내다 본 사회간접자본(SOC) 건설에도 박차를 가해 싱가포르 항만공사를 설립해 세계 일류 수준의 컨테이너 항구를 건설했고, 창이 국제공항을 건설해 싱가포르를 물류 중심지, 동서양 항공의 요충지로 만들었다. 또 세계 유명 금융기관을 적극 유치해 싱가포르를 동남아시아 금융 중심지로 일으켰으며 자원빈국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공직자 급여를 세계 최고수준으로 끌어 올려 공무원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그는 국민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서는 권위적 통치가 불가피하다는 정치관을 가졌었다. “여론이나 지지율 등락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도자의 일이 아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신문 기사가 아니라 집 의료 직장과 교육”이라면서 ‘언론 자유’를 경시하는 태도도 가감없이 드러내곤 했다.

또 “국민이 사랑하는 지도자가 될지, 두려워하는 지도자가 될지 사이에서 나는 늘 마키아벨리가 옳다고 믿었다”면서 마키아벨리즘 신봉자라는 것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을 괴롭히는 정적(政敵)들에 대해서도 “말썽꾼들을 정치적으로 파괴하는 게 나의 일”이라면서 “내 가방 안에는 매우 날카로운 손도끼가 있다. 만약 말썽꾼과 겨루게 된다면 나는 손도끼를 사용할 것”이라는 말하기도 했다.

리 전 총리는 “질서를 넘어선 자유는 용납되지 않는다”며 태형(笞刑)을 도입하는 등 강력한 법치로 나라를 다스렸다. 담배꽁초 투기, 화장실 물 내리기 등 사소한 부분까지 통제하자 ‘정부가 일일이 간섭하는 유모 국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독재라는 비난에 대해서도 아시아가 서구를 따라잡으려면 강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아시아적 가치’를 주장해 당시 아시아에 만연했던 독재를 옹호하는 논리를 폈다는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개발과정에서 무력을 동원하거나 착취, 인권 침해 논란을 초래하지 않았고 “부패는 망국의 지름길”이라며 측근도 봐주는 법이 없었던 청렴한 지도자여서 ‘온건한 독재자’로 불렸다. 1986년 개국공신이자 최측근인 태 치앙완 국가개발부장관이 두 차례에 걸쳐 40만 싱가포르 달러의 뇌물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자 망설임 없이 구속수사를 지시했다. 결국 태 장관은 감옥에서 자살했다. 본인에게는 더 엄격했다. 1995년 부동산 급등으로 자신의 일가에 대한 투기 의혹이 일자 조사를 자청했고, 무혐의 결론이 난 뒤에는 차익을 모두 기부했다.

부인 콰걱추(柯玉芝) 여사가 2010년 89세를 일기로 타계했을 때에는 “그녀 없이 나는 다른 사람으로 다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다만 그녀가 89세의 인생을 꽤 잘 살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겠다. 하지만 마지막 이별의 이 순간 내 마음은 슬픔과 비탄으로 무겁다”며 절절한 사부곡(思婦曲)을 감추지 않았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최창봉기자 cer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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