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銀, ‘검은돈’ 축재 적극 개입… 탈세-불법송금 도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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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IJ, 고객명단-불법영업 폭로
독재자 측근-中고위층 등이 단골… 비밀주의 앞세워 203개국서 유치
2007년 당시 130조원 자산운용

영국을 대표하는 은행인 HSBC홀딩스 산하 프라이빗뱅킹(PB) 스위스 지부가 전 세계 권력자와 부자들의 돈을 비밀리에 관리해주면서 탈세 컨설팅에까지 적극 나선 사실이 드러났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는 8일(현지 시간) 홈페이지에 ‘스위스은행 고객정보 유출(스위스 리크스·Swiss Leaks)’이라는 제목으로 HSBC 스위스 제네바 지부의 탈법 영업과 탈세가 의심되는 고객 정보를 공개했다. 이번 취재는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와 영국 BBC 대표 탐사프로그램 파노라마팀 등이 함께 진행했다.

ICIJ는 “1988∼2007년 HSBC 제네바 PB센터의 전 세계 203개국, 10만6000명의 고객 정보를 입수했다”며 “이들이 예치한 금액만 총 1000억 달러(약 109조4900억 원)를 웃돌 것”이라고 추정했다. 명단에는 영국 러시아 인도 멕시코 등 국가의 전현직 정치인 6만여 명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료는 2007년 퇴사한 HSBC 전 직원 헤르베 팔치아니 씨(43)가 퇴사 직전 고객 명단을 해킹해 프랑스 세무당국에 넘기면서 유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BBC는 이날 “ICIJ 자료를 분석한 프랑스 당국이 자료에 등장한 99.8%의 고객이 탈세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보도했다.

○ 불법 자금 속속 유입

HSBC는 1999년 스위스 제네바의 한 PB 은행을 인수해 자사의 PB센터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 PB센터는 본사의 통제를 크게 받지 않으면서 제네바에 있는 다른 스위스 은행들처럼 철저하게 비밀주의를 준수했다. 그러면서 2007년 현재 3만412개의 계좌, 780억 파운드(약 130조5000억 원)의 금융자산을 운용했다고 ICIJ는 밝혔다.

일단 이날 공개된 일부 명단만 봐도 화려하다. 중동지역 국왕들을 비롯해 각국 권력자와 관련된 사람이 줄줄이 등장한다. 30년 독재 이후 ‘아랍의 봄’을 가져온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의 측근인 라시드 무함마드 라시드 전 통상산업 장관 계좌에만 3100만 달러(약 339억 원)가 남아 있었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운영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광산재벌 압둘카림 단 아주미의 계좌에도 46만7592달러(약 5억1196만 원)가 있었다.

리펑 전 중국 총리의 딸인 리샤오린의 계좌에도 248만 달러(약 27억 원)가 있었다. 성직자도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카레킨 2세 총대주교도 110만 달러(약 12억 원)를 가지고 있었다.

중동의 군주들은 오랜 단골이었다. 현재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은 4180만 달러(약 457억 원)를 예치했다. 까부스 빈 알사이드 오만 국왕은 1974년부터 계좌를 가지고 있었고 4460만 달러(약 488억 원)를 예치했다. 모로코 무함마드 6세 국왕도 910만 달러(약 99억 원)를 예치했다. 프랑스 패션 브랜드 니나리치의 상속녀인 아를레트 리치 씨(73)는 파나마에 본사를 둔 파리타 콤파니아 피난시에라라는 회사의 명의 등 3개 계좌를 통해 2440만 달러(약 267억 원)를 맡겼다.

고객의 국적은 스위스가 312억 달러로 가장 많았고 영국(217억 달러) 베네수엘라(147억 달러) 미국(133억 달러) 프랑스(125억 달러) 등의 순이었다. 한국인 및 법인도 20개 계좌를 보유했고 2130만 달러(약 232억 원)를 예치했다.

○ 불법 자금세탁을 돕다


ICIJ 보도에 따르면 이 은행은 일부 고객과 결탁해 본국 정부에 신고하지 않은 ‘검은’ 계좌를 숨겼으며 국제적인 범죄자, 부패한 기업가, 위험한 개인들에게도 계좌를 제공했다. 기니 국방부는 카텍스 광물회사를 통해 라이베리아 반군에 무기를 팔았다. 카텍스 광물회사의 계좌에는 714만 달러(약 78억 원)가 예치됐다. 라이베리아 반군은 내전으로 숱한 생명을 앗아갔다.

은행은 또 고객들의 탈세 행위에 눈을 감은 정도가 아니라 내야 할 세금을 물지 않도록 고객들에게 탈세 정보를 제공했다.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 해외 조세 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우고 해당 기업 계좌로 예금할 수 있도록 도왔고, 강화된 세법을 피해가는 방법까지 알려줬다.

돈 많은 주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ICIJ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덴마크의 주부 하네 톡스 씨(57)는 2005년 제네바의 HSBC PB센터를 찾았다. 은행원은 “조세 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우면 된다”고 조언했다. 톡스 씨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2일 동안 제네바의 5성급 호텔에 머무르고 현금 1만6000달러(약 1700만 원)를 찾아갔다. 이렇게 주부라고 기재된 고객만 7300명 이상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주도 타깃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에파트대 부이사장인 롤로와 알파이살 알사우드 공주(67)는 케이맨 제도에 본사를 둔 펄엔터프라이즈 명의로 175만 달러(약 19억 원)를 예치했다.

○ 위협받는 스위스 비밀주의

스위스는 1934년 은행비밀법을 제정해 10만 프랑 이상 예치한다면 예금주의 이름 없이 숫자와 문자로 된 계좌만으로 입출금이나 거래명세서 작성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러나 세계 금융위기 후 재정 압박에 시달린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가 자국민 탈세 추적에 나서면서 스위스에 비밀주의를 포기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스위스는 지난달 외국 조세 당국이 관심을 가질 만한 계좌정보를 발견하면 이를 ‘자발적으로’ 통보하는 내용의 법 초안을 공개했으며 이르면 2018년 비밀계좌제를 폐지할 예정이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검은돈#스위스#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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