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 덕분에 잘살게 됐다”… 거리마다 鄧 칭송 문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18일 03시 00분


[中 덩샤오핑 탄생 110주년]생가 있는 광안市 가보니

① 15일 쓰촨 성 광안 시 셰싱 진 파이팡 촌의 덩샤오핑 생가에는 30도가 넘는 무더위에도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중앙 현관의 현판은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쓴 것이다. ② 덩샤오핑의 생가가 있는 쓰촨 성 광안 시의 시가지에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는 대형 사진과 문구가 세워져 있다. 문구는 “덩샤오핑의 은혜에 감사해, 덩의 고향 발전에 공헌하겠다”는 뜻이다. 광안=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15일 쓰촨 성 광안 시 셰싱 진 파이팡 촌의 덩샤오핑 생가에는 30도가 넘는 무더위에도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중앙 현관의 현판은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쓴 것이다.
덩샤오핑의 생가가 있는 쓰촨 성 광안 시의 시가지에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는 대형 사진과 문구가 세워져 있다. 문구는 “덩샤오핑의 은혜에 감사해, 덩의 고향 발전에 공헌하겠다”는 뜻이다. 광안=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 탄생 110주년인 22일을 앞두고 중국중앙(CC)TV와 런민(人民)일보 등 관영 매체들이 그를 재조명하고 있다. 이를 두고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반부패 개혁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덩샤오핑 띄우기’에 나섰다는 관측들이 많다. 덩샤오핑의 고향을 찾아가 그의 과거와 현재까지 미치는 영향을 짚어본다. 》

“덩샤오핑의 은혜에 감사해, 덩의 고향 발전에 공헌하겠다.”

“존경하는 덩샤오핑 동지, 광안(廣安) 인민은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15일 오전 중국 쓰촨(四川) 성의 성도인 청두(成都)에서 동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덩샤오핑의 생가를 찾기 위해 ‘청난(成南) 고속도로’를 달려 광안 시 경계에 들어서자 그의 커다란 얼굴과 함께 이런 문구가 새겨진 붉은색 입간판이 줄지어 나타났다. 광안 시 중심에서 그의 생가가 있는 셰싱(協興) 진 파이팡(牌坊) 촌으로 가는 길 양쪽에는 크고 작은 깃발과 안내판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택시 지붕 광고판에도 덩의 탄생 110주년 관련 광고가 나왔고 크고 작은 상가들도 자체적으로 추모 간판을 세웠다. ‘중국이 낙후함을 벗어난 데는 마오쩌둥을 잊지 않고, 부를 쌓은 데는 더욱 덩샤오핑을 생각한다(飜身不忘毛澤東 致富更思鄧小平)’는 문구가 파이팡 촌 진입로 입구 양옆에 걸려 있었다. 덩은 ‘선부론(先富論)’을 기치로 사회주의 평등 이념에 집착하지 않고 일부 계층이나 지역부터 먼저 발전하고 이를 파급한다는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내세웠다. 이는 중국을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발전시키는 밑바탕도 됐지만 심화되고 있는 부의 불평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 “가재도구까지 모두 나눠줘라”


833.4m² 면적에 ‘ㄷ’자 모양으로 17개의 방과 창고 등이 배치된 생가는 소지주 집안이었음을 보여준다. 덩은 1949년 신중국 성립 이후 당시 광안 현 위원회에 서신을 보내 자신의 생가 관리와 관련해 “특별 대접 하지 마라. 일체의 가산은 농민에게 나눠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1951년 인근 농민 9가구가 그의 생가로 이사와 살고 중앙 거실 2칸은 사무실로 사용됐다.

생가를 자진 헌납한 조치로 문화대혁명 시절 그가 실각했을 때 집과 가산, 집기 등이 파괴되지 않고 보존됐다. 나눠 받은 농민들이 사용 또는 보관해 나중에 생가를 복원할 때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혁개방 이후 위대한 지도자로서 덩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1980년대 초부터 국내외 언론들과 정치인들이 ‘개혁개방의 뿌리’를 찾고자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이곳에 살던 농민들은 하나둘씩 떠났다. 중앙과 쓰촨 성 정부는 생가를 수리해 ‘고거(故居) 박물관’으로 조성했다.

2001년 7월 ‘국가중점문물’로 지정된 생가 정면 중앙에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쓴 ‘덩샤오핑 동지 고거’ 편액이 걸려 있다. 그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좌측 방에는 나무 침대와 책상이 놓여 있고 프랑스 파리 유학 시절의 사진도 걸려 있다. 여성 해설원은 “중국의 운명을 바꾼 지도자의 생가치고는 지극히 소탈하고 간소한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덩은 1919년 파리 유학 준비를 위해 청두로 떠난 뒤 다시는 이곳을 찾지 않았다. 그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찾아오면 현지 관리나 주민들에게 불편을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 아들 유학이 부친의 최고 보람

그의 유골은 1997년 유언에 따라 홍콩 앞바다에 뿌려졌지만 그의 부친인 덩사오창(鄧紹昌)은 생가 인근에 묻혔다. 부친은 자(字)가 원밍(文明)이어서 덩원밍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50대 남성 천하이쥔(陳海軍) 씨는 “훌륭한 아버지가 위대한 아들을 만들었다”고 칭송했다. 묘비 설명문에도 “청두의 법정대학에 다녀 생각이 개방적이었던 그가 가장 보람 있어 한 일은 샤오핑을 파리에 ‘근공검학(勤工儉學·근면하게 일하면서 검소하게 살며 공부)’ 유학생으로 보낸 것”이라고 적었다.

생가 박물관 내 덩샤오핑의 동상 주변에는 방문객들이 화환이나 꽃다발을 사서 갖다 놓았다. 그의 대형 입상과 그에 관한 자료를 보관하는 진열관은 탄생 110주년을 맞아 첨단 멀티미디어 안내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잠정 폐쇄됐다. 그 대신 진열관 건물 앞 야외에서 덩의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는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고거 박물관 입구에서 생가에 이르는 길이나 동상 주변에는 중앙과 지방기관, 지도자들이 심은 나무가 많았다. 국가통계국의 ‘통계림(林)’처럼 이름도 붙여 놓았다.

이는 덩이 나무심기에도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그는 1981년 12월 13일 5차 전국인민대표대회 4차회의에서 ‘전 국민 의무 식수 운동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만 11세 이상 국민은 환자나 노약자가 아니면 누구나 한 해에 3∼5그루의 나무를 심도록 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04년 이후 이곳에는 중앙과 지방정부, 주요 인물이 자신들의 이름으로 나무를 심어 덩의 생가 박물관은 작은 숲을 방불케 한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도 2004년 5월 17일 저장(浙江) 성 서기 시절 관리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해 ‘저장림’을 조성했다.

광안=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중국#덩샤오핑#덩샤오핑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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