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주고 받기 ‘푸틴의 오만’ 국민 회초리 맞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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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집권당, 총선 ‘사실상 참패’

내년 3월 다시 대통령에 등극할 날만 기다려온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에게 이번 총선에서 나타난 민심은 매서웠다. 비록 의석수에서는 과반수를 차지했지만 “푸틴을 심판한 것이자 그에 대해 벌을 준 것”이라는 외신(영국 더타임스)의 표현처럼 이번 선거에서 드러난 민심은 재집권 항로에 불어 닥친 거센 역풍이었다.

집권당인 통합러시아당 소속 보리스 그리즐로프 두마(하원) 의장이 5일 사실상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푸틴 총리는 5일 선거운동본부에 나타나 “이번 선거 결과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짤막하게만 말했다.

① 집권당 패배의 원인은?

푸틴은 1999년 8월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 의해 총리로 임명된 뒤 그해 12월 대통령 권한대행에 올랐다. 그가 최고 지도자로 군림한 2000년대는 국제유가가 크게 오르기 시작해 옛 소련 붕괴 당시 한때 모라토리엄(채무 지불유예) 위기까지 갔던 상황에 비하면 경제상황이 개선됐다. 푸틴은 이때 체첸 반군에 대한 강력 진압과 서방에 대한 강경 노선으로 인기를 높였다. 옛 소련 붕괴 이후에는 채무위기에 몰리자 구제금융을 조건으로 러시아의 주권을 제한하려고 하는 등 서방으로부터 수모를 당했다. 이때 푸틴이 보여준 당당한 모습은 러시아인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었다.

하지만 올 9월 푸틴 총리가 내년 3월 대선에 출마하고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총리를 맡기로 결정하자 러시아 내부에서는 유례없는 ‘권력 스와프’에 반발 움직임이 나타났다. 서방 언론은 이번 총선에서 집권당 지지도 하락의 가장 큰 요인으로 ‘푸틴 권력에 대한 피로감’을 들었다. 권력자들끼리 대통령과 총리직을 주고받기로 약속하는 ‘오만한 거래’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된다.

부패 등으로 얼룩진 정부에 대한 비판이 폭발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통합러시아당이 부패한 관료를 대변하며 심지어 ‘도둑당’이라는 인상까지 주면서 지지를 잃었다”고 전했다. AP통신은 부패를 더는 견딜 수 없어 이민을 가려는 사람들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2002∼2009년 해외로 빠져나간 러시아인은 약 50만 명에 이른다고 이 통신은 보도했다. 빈부격차의 심화도 심판의 배경으로 꼽힌다.

② 푸틴 재집권 가도 이상 없나?


이번 총선이 강한 안보정책, 정치적 수완, 쇼맨십으로 12년간 러시아를 지배했던 푸틴 총리의 지도력에 큰 흠집을 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로이터통신은 푸틴 총리에게 대적할 만한 비중을 가진 라이벌은 아직까지는 없다고 평가했다. 내년 3월 4일 대선에서 그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푸틴 총리는 집권 기간에 경쟁자가 성장하는 것을 철저히 막아 왔다.

러시아의 정치분석가 드미트리 오레슈킨은 “푸틴은 모든 것을 통제하는 데 익숙한 인물이다. 하지만 통합러시아당이 총선 과정에서 국민의 분노를 자아낸 상태에서 푸틴이 어떻게 대통령선거전을 치를 수 있겠느냐”며 “푸틴에게는 좋지 않은 기류”라고 말했다. 재집권 가능성을 낙관하기 어렵다는 분석인 셈이다.

푸틴 총리에 대한 부정적인 기류는 선거 전부터 드러났다. 지난달 20일 종합격투기 경기장에서 링 위에 올랐다가 관중의 야유를 받는 수모를 당했다. 웃통을 벗고 승마를 하거나 시베리아 강에서 승마를 했던 그는 강한 러시아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최근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배드민턴을 하거나 몇 분간 다이빙을 한 뒤 고대 유물을 건져내는 장면을 연출했을 때 그의 쇼맨십에 식상한 국민은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2008년 대선 때 공산당 후보로 출마해 메드베데프 현 대통령에게 패한 공산당 지도자인 겐나디 주가노프는 “이번 선거는 국민이 현 정부에 대한 신임을 거부한 것으로 집권 세력은 연정 파트너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③ 부정 선거 파문 어디까지 번질까?

선거를 참관한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는 5일 “선거관리 당국이 독립적이지 않고, 대부분의 언론은 편파적이었으며 정부가 부당하게 다양한 차원에서 선거에 개입했다”며 추악한(dirty) 부정으로 얼룩졌다고 평가했다. 시베리안시티의 한 투표구에서는 투표함의 3분의 1가량이 투표 시작 전에 이미 채워져 있는 등 사전 투표가 극성을 부렸다. 또 다른 모스크바의 투표구에서는 선거 관계자가 책상에 앉아 여러 장의 투표용지에 기표하는 장면을 유튜브 사용자가 촬영했다.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여러 투표소를 다니며 여러 번 투표하는 장면도 유튜브에 올랐다.

공산당 집권 시절 부총리를 지낸 보리스 넴초프는 “우리는 20년래 가장 추악한 선거를 지켜봤으며 선거라고 부를 수도 없고 차라리 러시아 국민으로부터 표를 도둑질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4일 모스크바 트리움팔라야 광장에서 선거부정에 항의해 시위를 벌이던 100여 명이 체포됐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50여 명이 연행됐다. 이날 시위 진압 경찰이 붉은광장 진입을 막았으며 5만 명가량의 군과 경찰이 신분을 위장한 채 모스크바 거리에 배치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영국 가디언 인터넷판이 보도했다.

④ 푸틴의 위기 타개책은?

푸틴 총리는 최근 잇따라 서방에 대해 대립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내부의 인기 하락을 외교적 긴장으로 만회하려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서방이 한목소리로 비난하고 퇴진을 요구하는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에 대해 서방과는 다른 대응을 하고 있다. 최근 시리아에 항공모함을 파견한 것도 눈에 띄는 결정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조지아를 회원국으로 끌어들이는 등 동진(東進)을 계속하는 것에 대해 러시아군 참모총장이 “서방과 러시아 간에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⑤ 러시아 시민사회에도 SNS 민주화 혁명이?

아랍 민주화운동처럼 이번 선거 돌풍의 배경에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역할이 컸다. AFP통신은 5일 “지난 총선 이후 4년 동안 러시아의 인터넷 보급률은 서구 수준에 이르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전했다. 총선을 앞두고 유튜브 및 SNS 이용자들은 부정선거 사례들을 신속히 전파하면서 부정선거에 맞섰다. 특히 독립선거 감시기구 골로스(‘목소리’라는 뜻)는 100여 건의 동영상 등 6000건의 선거 부정 사례를 수집해 인터넷에 올렸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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