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판 안철수’ 하시모토, 기성정치에 한방 먹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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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시장 당선 신드롬

기성 권력 위에 잠자던 일본 정치권이 성난 유권자들의 민심이 불러올 지각변동을 예감하며 떨고 있다.

27일 열린 오사카(大阪) 부(府) 지사와 오사카 시장 선거에서 일본 유권자들이 하시모토 도루(橋下徹·42·사진) 전 오사카 지사가 이끄는 지역 정당 ‘오사카유신회’를 압도적으로 지지한 것은 ‘일본판 안철수 신드롬’으로 불릴 만한 일본 정치의 대사건이었다. 유권자들이 민주당과 자민당이라는 기성 정당, 여기에 모든 것이 집중된 도쿄라는 지역 권력에 반기를 드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하시모토가 촉발한 지역 정당의 도전은 일본 정치 지형의 대대적인 변화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의 안철수와는 달리 하시모토는 잘나가는 현직 지방자치단체장이자 정치인이지만 기성 정당에 대한 염증이 투표로 이어졌다는 점에서는 한국과 닮은꼴이다. 하시모토 당선자는 임기 중 지사 자리를 내놓고 오사카 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우리로 치면 경남도지사를 그만두고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한 셈이다. 오사카 시장 선거 투표율은 60.92%로 직전 선거인 2007년 때보다 무려 17.31%포인트나 높았다. 지사 선거 투표율도 52.88%에 이른다.

일본 언론들은 선거 결과를 “기성 정당과 정치인의 구태를 거부하는 유권자의 표심이 반영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 국민은 2009년 8월 총선에서 민주당에 몰표를 던져 전후 첫 정권교체를 성사시켰다. 하지만 민주당 집권 이후에도 바라던 변화가 없자 2년 만에 기성 정당의 대안으로 지역 정당을 선택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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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하시모토의 독단적이고 보수적 성향 때문에 ‘하시모토 포퓰리즘’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일본은 지금 강한 리더십을 가진 하시모토류의 ‘극약처방’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 오사카 도(都) 구상 탄력 받을까

하시모토 당선자는 이번 선거에서 오사카 시의 ‘파괴’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인구 900만 명의 오사카 지역이 각각 오사카 부와 오사카 시, 사카이(堺) 시로 분산돼 행정이 중복되고 예산이 낭비되고 있으므로 단일화된 행정구역으로 묶자는 이른바 ‘오사카 도 구상’이 그것이다. 지하철과 수도 등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각종 대형 사회 인프라 사업에서 지자체들이 각각 경쟁을 벌여 인력과 예산 낭비가 심각하기 때문에 오사카를 도쿄처럼 도로 승격하고 인구 30만∼50만 명 단위의 특별구를 여러 개 설치해 한 사람의 지자체장이 일사불란하게 지휘하자는 안이다.

오사카 유권자들은 일단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구상이 실현되기까지는 남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 오사카 시와 사카이 시를 없애려면 해당 지자체 지방의회의 찬성 결의를 받아야 한다. 하시모토가 이끄는 오사카유신회는 올봄 지방선거에서 오사카 부 의회의 과반 의석을 장악했다. 하지만 오사카 시 의회에서는 제1당이기는 해도 과반수에 미치지 못한다. 지방의회를 통과한 후에는 중앙정부에 지방자치법 개정을 요구해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오사카유신회 열풍을 경계하는 민주당 등 기성 정치권과의 대결이 불가피한 대목이다.

○ 촉각 곤두선 일본 기성 정치권

기성 정치권은 갑작스러운 하시모토 열풍에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것이라며 태연한 척하면서도 향후 전개 과정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오사카유신회가 지방의정 활동에 비중을 둔 지역 정당이긴 해도 오사카 도 구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결 양상이 치열해지면 국회의원 후보를 직접 내며 전국 정당으로 세력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시모토 당선자는 “수도인 도쿄 한 곳만으로는 일본을 지탱할 수 없다. 오사카가 또 하나의 엔진이 돼야 한다. 중앙 정당과 오사카 도 구상을 협의하되 여의치 않으면 국회의원 선거에 직접 후보를 내는 방안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은 “동일본 대지진 당시 뒤늦은 행정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기성 정당에 등을 돌렸다”며 반성하고 있다. 자민당 역시 민주당에 실망한 유권자의 대안세력이 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고민 중이다.

정당 지지율이 각각 12%대인 민주당과 자민당은 다음 총선에서 어느 쪽도 압승을 거두기 힘들기 때문에 오사카유신회나 감세일본(나고야) 등 인기가 많은 지역 정당과 연계하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 특히 현직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와 거리를 두고 있는 민주당 내 최대 계파인 오자와파가 민주당을 탈당해 오사카유신회와 신당을 결성하려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이럴 경우 기성 정당이 지역 정당을 중심으로 헤쳐모이는 거대한 정계 개편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 중앙정계 거물과 대조되는 매력


“지금 일본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재다.”

하시모토 당선자가 올 6월 공식 행사장에서 한 말이다. 그의 말과 행동은 거침이 없다. “일본은 핵을 보유해야 한다”거나 “중국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는 일본의 매춘”이라는 과격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중앙정계의 거물들이 하나같이 우유부단한 리더십과 애매모호한 발언으로 외면 받는 현실에서 하시모토의 거침없는 언행은 카타르시스를 유발하는 측면도 있다.

2008년 오사카 지사 선거에서 상대 후보를 더블스코어로 누르고 일본 최연소(38세) 지사에 당선되기 전부터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나온 그는 본업인 변호사보다 인기 연예인으로 더 유명했다. TV 버라이어티 쇼 등에 출연해 재담과 해박한 지식을 뽐냈다. 주 9회 이상 TV에 출연할 정도였다. 2000년대 중반에는 한류스타 배용준에 비유해 ‘법조계의 용사마’라는 애칭을 얻었고, 주간지 슈칸분슌(週刊文春)이 실시한 앙케트에서 30∼50대 여성들로부터 ‘TV에 출연하는 이케멘(イケメン·미남)’ 1위로 꼽혔다. 캐주얼 차림에 항상 웃는 얼굴은 트레이드마크다. 3남 4녀의 아버지라는 것도 정치적 자산이다. 심각한 사회 문제인 저출산 해결책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그는 2006년 사회단체가 주는 ‘베스트 아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도쿄=김창원 특파원 changkim@donga.com  
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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