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라덴 사살 이후]영상으로 본 ‘9·11테러 주범’ 빈라덴의 은둔생활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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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한 나르시시스트… 골방에서 담요 두른 채 자신의 뉴스 보며 컴백 꿈꿔
연출된 테러리스트… 영상 메시지 제작땐 수염 염색 등 이미지 관리 신경

비좁은 방 안 낡은 책상 위에는 작은 구형 브라운관 TV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변변한 가구 하나 없이 TV와 컴퓨터만 눈에 띈다. 검은 천으로 창문이 가려져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각종 기기에 연결된 전선들만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헝클어진 회색 수염의 한 남자는 방바닥에 앉아 담요를 두르고 리모컨으로 위성TV 채널을 바꿔가며 뭔가를 찾고 있다. 다름 아닌 자신이 나오는 뉴스다. 남자는 뉴스에서 자신의 모습이 사라지자 이내 채널을 돌린다. 이번에는 사막 한가운데서 부하들을 이끌고 있는 다른 모습이 나왔다. 화면이 뚫어져라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는 남자는 마치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반한 나르시시스트 같았다. 이 남자는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테러조직의 지도자, 바로 오사마 빈라덴이다. “한창때였던 자신의 모습을 보며 컴백을 상상하는 노(老)배우 같았다.”(뉴욕타임스)

미국 정부가 빈라덴이 사살된 파키스탄 아보타바드 은신처에서 확보한 영상 5점을 7일 공개했다. 이 중 앞에 소개한 4분여짜리 영상에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빈라덴의 일상이 담겨있다. 황토색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바닥에 앉아 회색 수염을 쓰다듬는 빈라덴은 50대라기보다 노년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늙어 보인다. 그는 검은 실로 짠 모자를 쓰고 오른손에 리모컨을 쥐고 채널을 돌려가며 화면 속 자신의 모습을 지켜봤다. 공화당 마크 커크 상원의원(일리노이 주)은 “지구상 가장 애처로운 생물체”이자 “산만한(rambling) 나르시시스트”라고 평했다. 선전용으로 촬영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도 초라하고 ‘시시한 모습’의 빈라덴이 등장하는 이 영상을 누가 무슨 목적으로 촬영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화면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등장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바마 행정부 출범(2009년 1월) 이후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외신들은 이번 동영상 공개에 대해 빈라덴의 시신 사진을 공개하지 않기로 한 미국 정부가 그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라고 분석했다. 빈라덴의 집에 침입하지 않고서 이런 사적인 영상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BBC는 또 “연약한 빈라덴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미국 정부는 전 세계 그의 지지자들에게 알카에다 지도자의 이미지를 손상시키고자 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나머지 4점의 영상들에서 보여지는 빈라덴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지난해 10월경 녹화된 것으로 보이는 ‘미국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는 제목의 영상에서는 검은색으로 염색한 단정한 수염에 금색 가운을 입은 말끔한 차림이다. 미국 정부 관계자는 “빈라덴은 수염을 염색할 정도로 지지자에게 보이는 이미지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고 전했다.

이날 미 정부가 공개한 영상들은 모두 소리가 제거돼 있다. 화면 속에서 미국을 비판하는 그의 주장이 공개될 경우 지지자를 자극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CNN은 보도했다. 미국 정부는 빈라덴 은신처에서 입수한 영상 및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한 결과 “빈라덴이 알카에다의 얼굴마담 같은 상징적인 역할이 아닌 테러공격 계획을 세우고 전술 관련 결정을 내리는 실질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했다”며 “그의 은신처는 알카에다의 실제 지휘센터였다”고 설명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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