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민병대 오토바이로 ‘시위대 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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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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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이종훈 특파원 테헤란 르포

아자디 광장앞에 선 이종훈 특파원
아자디 광장앞에 선 이종훈 특파원
20일(현지 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 도심 파크웨이 로터리. 테헤란에서도 부촌으로 알려진 이곳은 서울로 따지면 강남에 해당한다.

이른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로터리 주변에 있던 시민 수백 명이 차도를 점거하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인도에서 구경하던 시민들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에게 “구호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무바라크, 벤 알리, 다음은 세예드 알리 당신 차례”라고 전해준다. 세예드 알리는 이란의 최고 종교지도자이자 명실상부한 최고 실력자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이름이다.

시위대가 얼마나 구호를 외쳤을까. 민병대원들이 탄 오토바이 100여 대가 시위대를 향해 달려왔다. 차도에서 벗어난 시위대를 인도까지 쫓아가는 오토바이도 있었다. 시민들은 이들이 휘두르는 곤봉을 피해 골목으로 뛰어들었고, 일부 용감한 시위대는 오토바이를 붙잡고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뜨거웠던 서울 거리를 경험했던 기자는 무조건 인근 식당으로 뛰어들었다.

▼ 도심 곳곳에서 숨바꼭질 시위… 오토바이 민병대 ‘공포의 대상’ ▼

세계사의 주요 챕터로 기록될 중동 민주화 혁명의 한복판에서 기자는 이란 테헤란을 찾았다. 이란은 해외 언론이 취재하기 어려운 곳으로 악명이 높다. 이집트 시위사태 현장을 취재하다 천신만고 끝에 17일 이란에 입국했다.

하지만 막상 시위현장에서 곤봉을 들고 돌진해오는 민병대를 보니 솔직히 겁이 났다. 카메라를 꺼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란에서 시위 현장에 나타나는 외국인은 거의 예외 없이 연행될 정도로 경찰의 주 경계 대상이라고 알려준 지인의 ‘경고’도 떠올랐다. 이처럼 이란의 반정부 시위 현장은 이집트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20일 이란 수도 테헤란의 거리에서 시위 진압을 위해 동원된 ‘바시지’ 민병대 소속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헬멧을 쓰고 곤봉을 든 채 모여 있다. 이들은 시위가 벌어지면 즉각 곤
봉을 들고 시위대를 향해 돌진했다. 유튜브 홈페이지
20일 이란 수도 테헤란의 거리에서 시위 진압을 위해 동원된 ‘바시지’ 민병대 소속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헬멧을 쓰고 곤봉을 든 채 모여 있다. 이들은 시위가 벌어지면 즉각 곤 봉을 들고 시위대를 향해 돌진했다. 유튜브 홈페이지
이날 테헤란에서 벌어진 시위는 대부분 쫓고 쫓기는 게릴라식으로 진행됐다. 인도에 모여 있던 시민들은 누군가의 신호에 따라 순식간에 거리로 모여 “신은 위대하다” “독재자는 물러나라” 등의 구호를 외치다 경찰이나 민병대가 나타나면 바로 해산했다. ‘쥐와 고양이 게임’이라는 외신의 표현 그대로였다.

가택연금 상태인 야권 지도자 미르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와 메흐디 카루비 전 의회 의장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에서는 테헤란을 비롯해 서너 개 도시에서 수천∼수만 명이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고 이날 주장했다. 그러나 정확한 시위 참여자 수는 알 길이 없다. 국영TV는 “테헤란은 아주 조용했다. 교통이 약간 막혔을 뿐”이라고 했다. 이란 경찰은 방송에서 폭발물을 소지하고 있던 시위대 한 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했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미르다마드 거리에서 경찰이 실탄을 발사해 시위대 한 명이 숨졌다는 소식도 들려왔지만 역시 확인되지 않았다. 한 야권 사이트는 “테헤란 거리 곳곳에서 널리 퍼져 벌어졌던 이번 시위는 성공적”이라고 했다. 숨바꼭질 시위를 통해 경찰, 민병대, 보안대 병력 수천 명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도심의 엥겔라브 광장은 경찰 순찰차와 폭동진압경찰을 태운 버스들이 광장 입구 주변에 늘어섰다. 경찰관들이 굳은 얼굴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엥겔라브 광장에서 서쪽으로 몇 km 떨어진 아자디 광장과, 이곳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5km가량 떨어진 발리아스르 광장도 마찬가지였다. 광장 입구와 광장으로 향하는 길가에는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대기하는 젊은이들이 수십, 수백 명씩 눈에 띄었다. 모두 오토바이용 헬멧을 쓰고 진압봉을 손에 들었다. 인근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니 이란혁명수비대 수하의 민병대 ‘바시지’ 소속 젊은이들인 것 같다고 했다. 경찰과 함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헬멧 속 눈매들이 날카로웠다.

이날 엥겔라브 광장이나 아자디 광장의 모습은 이틀 전인 18일 친정부 시위대 수만 명이 운집해 반정부 시위대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지던 때와는 전연 딴판이었다. 18일에는 기자도 사진까지 찍어가며 주변을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 철저한 언론 통제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사이트인 페이스북과 인터넷 동영상 전문 사이트 유튜브도 이란에선 14일부터 일주일째 불통이다. 현지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인터넷 뉴스사이트인 영국 BBC와 미국 CNN도 야권이 20일 시위를 예고한 17일경부터 차단됐다. 14일 벌어졌던 첫 번째 시위도 당일은 물론이고 이후로도 국영TV와 신문에서 단 한 줄, 한 컷도 보도되지 않았다. 세계적 주요 통신사인 AP, AFP통신과 아랍권 대표적 위성뉴스채널인 알자지라도 테헤란 현장에 기자를 보내지 못하고 현지 이란인이 전화나 e메일로 보내오는 소식을 토대로 기사를 작성하고 있었다.

○ 정치·종교권력에 실망한 젊은이들

테헤란에서 느낀 것은 이란 젊은이들의 고민이 30년 독재를 무너뜨린 이집트 젊은이들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다름 아닌 일자리 문제와 부패한 권력에 대한 분노였다.

이란은 뒤가 든든한 권력자의 자제가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돈 없고 힘없는 사람은 기회조차 얻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 테헤란 교민은 “지난해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딸 특채 파동으로 물러났다는 소식이 이곳 언론에 보도되자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은 이란인이 많았다”고 전했다. 이란의 성직자 최고위층을 칭하는 ‘아야톨라’는 주요 신학대 교수와 각종 정부 기관장을 여러 개씩 맡으며 이미 막강한 파벌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의 자녀들이 은행에서 엄청난 융자를 받은 뒤 갚지 않아 큰 문제가 된 사실은 이곳에선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테헤란 시내 미르다마드에 있는 대표적 이슬람 사원 엘샤트 모스크는 정치와 종교 권력자들의 기도회와 각종 행사가 자주 열리는 곳이다. 이곳에서 만난 모스크 인근 건물의 경비원 후세인 씨(33)는 “이미 젊은이들은 종교와 성직자를 믿지 않은 지 오래됐다”며 “종교가 정치를 지배하는 나라에서 종교가 이미 부패했는데 뭘 기대하겠느냐”고 말했다.

테헤란=이종훈특파원 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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