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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8월 25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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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괴물’의 등장 이후 자국(自國)의 지식자산을 지키려는 노력이 구체화되면서 특허전문회사와 국가 간에 ‘글로벌 지식경제 전쟁’이 벌어질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서둘러 대응하지 않으면 적지 않은 토종 특허권이 특허괴물의 소유로 넘어가 국내 기업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에 동아일보는 세계 최대의 특허전문회사인 인텔렉추얼 벤처스(IV)의 미국 워싱턴 주 벨뷰 시 본사와 연구소를 독점 취재했다. 지식경제 전쟁의 양상과 우리의 현실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벨뷰=김용석 기자 nex@donga.com》
“여기가 아닌 것 같죠?”
이달 2일, 미국 시애틀의 위성도시인 벨뷰의 한적한 교외. 주소를 보고 IV의 연구소를 찾은 운전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연구소는 한적한 거리의 후미진 창고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수첩 크기 정도의 작은 간판은 눈에 띄지 않았다. 괴물이라는 표현에 걸맞지 않은 첫인상이었다. 평범하다 못해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 발명가들의 천국
이런 생각은 연구소에 들어가면서 바뀌었다. 2500m² 규모의 연구소에 들어서자 한편에 자리 잡은 레이저 장치가 눈에 들어왔다. 30m 떨어진 반대편엔 모기장이 있었다. 이 장치는 레이저로 모기의 날갯짓을 분석해 성별을 알아낸 뒤 암컷만 태워 죽였다. 가장 효율적으로 개체수를 줄이기 위해서다. 아프리카의 말라리아를 퇴치하기 위한 이 연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마이크로소프트(MS)의 창업자 빌 게이츠 전 회장이었다.
“빌 게이츠는 요즘 일주일에 한 번씩 이곳을 찾아 말라리아 퇴치 기술, 허리케인을 잠재우는 아이디어 등 6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연구합니다. 우리는 다른 분야의 기존 아이디어와 특허 전문가를 지원하며 협력하죠. 그는 IV에 직접 투자도 했습니다.” 연구소를 안내한 IV 엔지니어링 분야 제프 딘 부회장의 설명이다.
연구소에는 엄청난 양의 실험기기가 있었다. 쇠를 깎아 모양을 만드는 공작기계에서부터 원심분리기, 전자현미경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IV가 기업, 대학으로부터 구입했거나 직접 연구하는 전자, 나노, 바이오 등 다양한 분야의 특허 및 아이디어를 미리 제품으로 구현해 보기 위한 실험기기다.
○ 특허괴물의 두 얼굴
IV는 발명가들에게 천사와 같은 존재다. IV는 50억 달러(약 6조2500억 원)의 탄탄한 재원으로 △기업과 대학의 특허를 사들이고 △대학, 연구소를 지원해 특허를 발굴하고 △자체 연구소에서 직접 발명가의 연구를 지원하는 세 가지 종류의 펀드를 운영한다. 특허의 옥석을 가리는 일은 MS, 벨연구소, 매사추세츠공대(MIT) 등 세계 최고의 기업 및 연구소 출신의 연구진 200여 명과 특허 변호사 200여 명이 함께 맡는다.
이들은 한 해에 4만여 건의 특허와 아이디어를 검토해 선별한다. 사들인 특허는 분야별로 모아 하나의 묶음(패키지)으로 만든 뒤 원하는 기업들에 유료로 제공한다. 특허가 패키지로 묶여 있기 때문에 웬만해선 그 범위를 피해 갈 수 없다. 이런 방식은 투자은행이 인수합병(M&A)을 통해 기업 가치를 부풀린 뒤 되팔거나 부동산 투기꾼들이 ‘알 박기’를 하는 방식과 무척 비슷하다. IV는 투자한 특허 중 2%만 성공해도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IV는 최근 2년 동안 10억 달러(약 1조2500억 원)에 가까운 수익을 올렸다. IV는 이 가운데 대학에서 사들인 특허의 경우 수익금의 20%를 발명가의 몫으로 배분했다. 하지만 기업, 개인 등으로부터 매입한 특허에 대해선 이익금 분배 비율을 공개하지 않았다.
IV는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과 기업이 특허를 사고파는 시장을 만들어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계 특허시장은 1990년 200억 달러에서 2007년 5000억 달러로 성장했다. IV의 기술 분야 글로벌 책임자인 패트릭 에니스 박사는 “IV는 아이디어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고 강조했다. 특허 전문가들도 “IV의 등장은 기업이 아닌 아이디어에 투자하는 발명 자본주의(Invention Capitalism) 시대를 앞당겼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IV는 특허를 사용하는 제조업체들에는 괴물과 같은 존재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작년부터 IV에서 수천억 원의 휴대전화 관련 특허 사용료를 내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미국 버라이즌과 시스코시스템스는 이미 2억∼4억 달러(약 2500억∼5000억 원)의 사용료를 냈다. IV는 다른 특허괴물과 달리 아직 소송에 나선 적은 없지만 발명가가 제 몫을 받지 못하면 법정에 가는 일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 “한국은 발명가가 제 몫을 받지 못하는 나라”
IV는 작년 말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국내 대학에서 260여 건의 아이디어를 매집해 논란의 대상이 됐다. 이 회사는 한국에 진출한 이유를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만들어내지만 이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정 회장은 싸이월드를 예로 들었다. 한국의 발명가가 세계 최초의 소셜네트워킹 서비스인 싸이월드를 만들었고, 마이스페이스 등 다른 나라 기업이 이 모델로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한국은 그 대가를 챙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IV의 국내 진출과 관련해 5000억 원의 특허펀드를 조성해 ‘토종 특허’를 매입하는 등 선제적 대응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대기업들이 펀드 구성에 적극적이지 않아 성공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이에 비해 핀란드는 독자 펀드를 만들기보다 IV와 손잡고 지식자산에 투자할 것으로 보인다. 핀란드 기업과 대학이 만든 특허를 IV가 사들인 뒤 다른 나라로부터 사용료를 받아내 수익금을 나누는 모델이다.
::발명 자본주의(Invention Capitalism)
기존 펀드가 주식이나 채권 등에 투자하는 것과 달리 아이디어, 특허 등 지식자산에 투자해 수익을 올리는 발명자본(또는 창의자본)이 투자행태의 중심이 되는 것을 말한다. 지식자산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지식경제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런 투자시스템을 일컫는 발명 자본주의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한국, 발명가에 보상 미흡, 우리가 발명영웅 만들 것”
―한국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 가능성은….
“사용료 협상을 계속 하고 있다. 하지만 협상이 잘 되지 않는다면 손해를 보는 발명가들이 있으니, 법정으로 가야할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다.”
―한국의 발명 환경을 어떻게 보나.
“한국은 무척 창조적이지만 발명에 대한 보상은 작다. 발명가로 성공한 사람이 거의 없다. 그들은 삼성 같은 대기업에 취직할 뿐이다. 이는 좋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한국에서 발명 영웅을 만들 것이다.”
―특허전문회사를 설립한 계기는….
“특허는 법적인 부분일 뿐이다. 우리는 발명회사(Invention Company)다. 과거에는 발명만 갖고 돈을 벌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누가 더 제조를 잘 하는지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이디어를 가진 기업이 돈을 번다. 기술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기업은 소송의 위협에 빠진다. 우리는 기업들이 손쉽게 발명가를 찾아 협상하고 아이디어를 사용하도록 해준다. 다른 영역은 성장이 둔화하고 있지만 아이디어는 그렇지 않다.”
―‘특허괴물’에 대해 사악한 회사라는 비난이 있다.
“막무가내로 소송을 하는 특허괴물과 우리는 다르다. 사실 발명가들도 소송을 원치 않는다. 돈이 많이 들고 기업과 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대 기업과 대화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소송을 택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업과 협상해 발명가의 몫을 받아줄 뿐이다.”
IV 공동창업자 에드워드 정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