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악몽” 클린턴 국무도 짜증낸 美 공직자 검증절차

입력 2009-07-16 02:57수정 2009-09-21 23:43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후보마다 10박스 분량 자료 검토
이웃사람 만나 술 습관까지 확인

미국 텍사스대 전기공학과 이길식 교수는 수년 전 워싱턴에 있는 미 해군연구소로부터 방문 과학자로 와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6개월 과정의 코스였다.

그런데 신원검증을 위해 작성해야 하는 서류가 30장이 넘었다. 아내와 자식은 물론 부모 형제, 장인 장모가 기입해야 서류도 있었다. 최근 3년간 이웃에 산 사람 4명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그동안 거쳐온 직장의 동료와 상관의 연락처, 세금 관련 기록, 교통법규 위반 여부, 어떤 종류의 소송이든지 관련된 적이 있는지 등을 상세히 적어내야 했다.

그후 얼마 뒤 국방부의 검증 담당 직원이 이 교수의 학교를 찾아와 학과장을 포함한 동료 교수, 학생, 사무처 직원 등을 각각 30분씩 면담했다. 그리곤 이 교수 본인에게도 시시콜콜 물었다. 술은 얼마나 자주 마시는지, 여러 사람 앞에서 옷을 벗은 적이 있는지, 부인에게 말 못할 사연은 있는지 등 사생활을 발가벗기는 듯한 질문도 많았다.

검증직원은 이 교수가 말한 걸 요약 정리한 뒤 다시 불러주면서 종이에 받아 적어달라고 요청했다. 한 글자라도 오자가 나면 줄을 긋고 서명하고, 빈공간도 줄을 긋고 서명해야 했다. 그리곤 모든 진술이 진실임을 서약하는 서명을 했다. 검증직원은 "지금까지 이 교수처럼 주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사람은 본적이 없다"며 협조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수개월뒤 이 교수는 해군연구소 근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후 한참이 지나서 이 교수는 메릴랜드 주에 사는 대학원 동기와 식사를 하다가 국방부 검증직원이 이 친구까지 찾아갔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됐다. 이 교수는 신원검증 신청서 제출때는 물론이고 누구에게도 그 친구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추정컨대 검증직원이 이 교수의 학창시절 지도교수를 통해 소개를 받은 것 같았다. 한 다리 건너서 물어보면 더 정확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방법을 쓴 것 같았다.

미국 본토 출생자가 아닌 이민자 출신이어서 더 까다로웠던게 아닌지 궁금해 공직이나 정부 관련 연구소에 근무하는 미국인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대부분 비슷하거나 더 까다로운 과정을 거쳤음을 알게됐다.

사실 이 교수의 경험은 미국에선 그리 특별한게 아니다.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카운티에 사는 크리스 길버트 씨(71)는 지난주 연방수사국(FBI) 직원의 방문을 받았다. 앞집에 사는 사람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 온 것이었다. FBI 직원은 "그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게 아니라 공직 임용 대상자여서 검증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뒤 그가 평소 술에 취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는지, 집을 나가고 들어오는 시각은 일정한지, 가족들 중에 유별난 행동을 보이는 사람은 없는지 등 온갖 것을 물어봤다.

이처럼 미국에서 주요 공직을 맡으려면 길고 긴 까발림을 당해야 한다. 심지어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13일 직원들과의 간담회에서 국무부 산하 국제개발처 처장 자리가 계속 비어있는걸 놓고 "(공직자) 검증 절차는 악몽"이라고 불평을 토로할 정도다. 클린턴 장관은 "전도유망한 후보자들이 복잡한 인사 검증 절차 때문에 공직진출의 흥미를 잃고 있다"며 "(검증 절차가 시작되면) 18세 이후 살아온 모든 곳을 기억해야 하며 아는 모든 외국인의 이름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브루킹스 연구소 후원 프로젝트로 '대통령 임명직 내정자가 살아남기(A Surviver's Guide for Presidential Nomineees)란 책을 발간한 뉴욕대 폴 라이트 교수에 따르면 미국에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는 3000개 가량이며, 그 가운데 1000개 가량이 상원 청문회 대상이다.

3000개 가량인 대통령 임명직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려면 60쪽이 넘는 서류를 스스로 작성해 제출해야 한다. 자신이 학창시절에 공산당이나 극우파 서클에 가입한 적이 없으며, 마약을 한 적이 없음을 증언해줄 고교 친구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대야 한다. 그동안 살아온 모든 곳의 주소, 캐나다와 멕시코를 포함해 지난 15년간 다녀온 모든 해외 여행 행선지와 목적도 명시해야 한다. 백악관의 자리에 들어가려면 집의 잔디를 정원관리 회사에 맡겨 깎는지 여부까지 밝혀야 한다. 그리곤 자신이 적어낸 사항의 진실성을 검증하는 기나긴 실사 과정을 견뎌야 한다.

미국에서 고위 공직자 검증은 백악관 인사팀과 국세청(IRS), FBI, 공직자윤리국(Office of Government Ethics) 등이 공조를 이뤄 실시한다. 이런 기관들은 대부분 검증 전문요원을 공채해 전문가를 양성한다. 정권교체기엔 정권인수팀의 검증팀이 합류한다.

버락 오바마 정부 출범 당시 정권인수팀은 10~15명의 변호사들로 이뤄진 팀을 여러 개 구성했다. 이 팀은 당시 후보자 1명 당 많게는 10개가 넘는 박스 분량의 자료를 검토했다. 그런데도 상무장관에 내정됐던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 톰 대슐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 등 낙마자가 여러 명 나와 검증 소홀 논란이 일었다.

상원 원내대표를 지낸 거물급 정치인인 대슐 씨의 경우 당시 심층 검증이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가 언론에 장관 후보자로 이름을 흘렸다. 회계전문가들이 대슐 씨의 기록을 뒤져 그가 사실상 개인 운전기사를 제공받고도 세금보고를 누락한 사실, 의료보험 관련 단체에서 연설하고 받은 강연료 등 논란이 될 대목들을 찾아냈지만 이미 늦었던 것이다.

텍사스대 이길식 교수는 "짧은 6개월의 방문 과학자 준비 기간에 많은 것을 배웠다. 항상 조심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단 한번의 과음으로 동네에서 소란을 피워도 고위직에 갈 때는 어려움이 있겠고, 과거라는 역사를 필요한 시점에서 바꿀 수가 없기 때문에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떳떳한 삶을 살아야함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