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동유럽 경제]<하>폴란드의 혹독한 겨울

  • 입력 2009년 2월 25일 02시 59분


무거운 발걸음폴란드 통화인 즈워티화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폴란드 경제가 얼어붙고 있다. 즈워티화 가치 하락으로 대형 마트의 수입제품 가격이 일제히 오르자 환율 변동에 둔감한 재래시장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쏠리고 있다. 수도 바르샤바에서 재래시장으로 향하는 인파. 바르사뱌=정위용  특파원
무거운 발걸음
폴란드 통화인 즈워티화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폴란드 경제가 얼어붙고 있다. 즈워티화 가치 하락으로 대형 마트의 수입제품 가격이 일제히 오르자 환율 변동에 둔감한 재래시장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쏠리고 있다. 수도 바르샤바에서 재래시장으로 향하는 인파. 바르사뱌=정위용 특파원
외국자본 떠나간 자리에 ‘공장 문닫는 저승사자’ 활개

시내 곳곳 짓다만 건물… 인부 체임 줄이어

대출 못갚는 주민들 집 경매처분 40% 급증

외국투자가 “과열서 정상 찾아가는 것일뿐”

《환율이 요동쳤던 24일 오전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시 도마니예프스키 거리의 한 재래시장에는 장바구니를 든 중년 여성과 나이든 연금생활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이 그동안 자주 찾지 않던 재래시장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물건 값에 아직 환율 변동분이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래시장 건너편의 대형 마트는 지난주 폴란드 화폐인 즈워티화 가치가 폭락하자 물건 가격을 일제히 올려놓았다.》

재래시장 주변에는 그동안 폴란드 경제가 성장하면서 ‘역사 속으로’ 모습을 감췄던 전당포가 속속 다시 등장하고 있다. 20대 초반의 한 여성이 휴대전화를 맡기고 300즈워티(24일 환율로 약 19만 원)를 바꿔가자, 신분증을 확인하던 전당포 주인은 안타까운 듯 쳐다봤다. 그는 “요즘 생활비가 부족해 전당포를 찾는 서민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즈워티화 폭락 현상을 바라보는 외국인들의 눈은 냉정했다. 피아트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한 외국인은 “그동안 과대평가됐던 즈워티화가 정상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스웨덴계인 노르데아 은행에서 일하는 김영완 바르샤바 부지사장은 “즈워티화의 평가절하는 8월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장은 문 닫고, 채권추심 업체만 호황”=외국계 금융회사가 많이 입주해 있는 바르샤바 금융센터 건물 입구에는 채권추심회사 직원들이 회사이름 알리기에 분주했다. 24일자 영자주간지 ‘바르샤바의 목소리’에는 바르샤바에서 영업을 하는 채권추심회사 15곳의 명단이 광고로 올라올 정도로 이들 회사는 마케팅 활동에 적극적이다.

이들은 폴란드에선 ‘공장 문 닫게 하는 저승사자’로 불린다. 주요 거래처는 폴란드에서 자금 회수를 서두르고 있는 외국계 금융기관이다.

요즘 폴란드 TV에선 폴란드에 투자한 외국계 자동차회사와 부품업체, TV 조립 공장 등이 조업 단축과 공장 폐쇄에 들어갔다거나, 폴란드 수출이 전년에 비해 대폭 감소했다는 등 ‘우울한 뉴스’ 일색이었다.

바르샤바 거리 주변에는 스페인 건설사가 짓다가 만 건물이 즐비했다. 폴란드 국회의원들은 24일에도 “외국계 건설사가 하청업체에 공사대금을 주지 않으면 위약금을 2배로 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공사장 인부들은 “외국 건설업체들이 공사장에 중장비만 남겨놓고 폴란드를 떠나면서 두 달째 월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갑작스러운 환율 폭등에 따른 분쟁 증가로 호황을 맞은 곳은 외국계 로펌. 폴란드 변호사 아담 즈드로프스키 씨는 유창한 영어로 “고객인 오스트리아 회사가 승소하면 성공 사례비가 소송 금액의 5%가 넘는다”고 자랑했다.

▽주름살 늘어가는 중산층=23일 오후 정유회사 직원 콘라드 키에드로친스키 씨(37)는 친구들과 함께 바르샤바 쇼핑몰 옆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에 들렀다. 그는 “즈워티화 폭락으로 한 달 사이 가처분 소득이 30% 줄어 약속 장소를 일식집 대신 패스트푸드점으로 정해 외식비를 절약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할 당시만 해도 즈워티화는 안정세를 보여 ‘외환위기 안전지대’로 꼽혔던 폴란드는 최근 환율 폭등으로 중상층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모습이었다.

영자 주간지 바르샤바비즈니스저널은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가 빚을 갚지 못해 살던 집을 경매 처분하는 사람들이 최근 40% 이상 증가했다”고 전했다.

특히 즈워티화 가치가 높았던 지난해 상반기 거래대금을 외화로 지불하기로 계약을 맺었던 중소기업체 사장들은 최근 줄 도산 사태를 맞고 있다.

▽제 발등 찍은 차입 경제=폴란드 재무부는 지난주부터 유럽연합(EU) 지원금 13억 유로를 시중에 풀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시장 개입으로 외환시장이 안정될 것으로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23일 유로화 대비 즈워티화는 4.7즈워티로 지난주보다 안정됐으나 즈워티화의 추가 하락 요인은 곳곳에 널려 있다.

즈워티화가 약세를 보이는 요인으론 과도한 외채와 경상수지 적자 폭 확대, 적은 외환보유액 등이 꼽히고 있다. 폴란드 정부는 환율 변동을 시장에 맡겨 지금까지 외환시장을 방관하다가 지난주에야 처음으로 개입했다.

하지만 환율 폭등을 가져온 요인은 그대로 남아 있어 정부 개입이 성공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오히려 보유외환 대비 단기 외채의 비중은 지난달 이미 100%를 넘어섰고, 지난달 무역 수지 적자폭도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40% 이상 늘었다.

이태식 KOTRA 바르샤바 무역관장은 “과도한 외화 차입에 의존한 성장 정책이 외환위기 시대에 제 발등을 찍는 비수로 돌아왔다”고 설명했다.

물론 폴란드는 동유럽 국가 중 서유럽 국가의 자금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이고 인구 3800만 명의 경제 규모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다른 동유럽 국가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렇지만 이번 경제위기가 사회격변을 몰고 올 것으로 예상하는 전문가들은 늘어만 가고 있다. 2월은 공교롭게도 자유시장주의 지지자들이 원탁회의와 무혈혁명을 통해 공산주의 세력을 물리친 지 20년이 되는 달이다.

바르샤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동유럽 수출 반토막-현지공장 감산

“신흥시장 통째로 잃을라”한국 가전-車기업들 긴장

동유럽 국가들의 부도 위기설이 불거지면서 국내 기업들이 크게 긴장하고 있다.

한국의 동유럽 수출은 이미 1년 전에 비해 반 토막이 났다. 여기에 ‘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이라는 최악의 상황마저 빚어진다면 신(新)시장을 통째로 잃는 것은 물론 현지 생산라인의 정상가동도 장담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KOTRA는 24일 “지난주 동유럽 지역의 각국 코리아비즈니스센터(KBC)에 디폴트와 관련한 긴급 현장조사를 지시했다”며 “이번 주 목요일(26일)까지 1차 보고를 받은 뒤 이를 기반으로 관련 상황을 분석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KOTRA는 국가별 부도 가능성을 살피는 한편 서유럽의 대형 투자사들이 이 지역에서 대출을 회수하거나 투자를 지연하는지 등에 대해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한국의 수출은 위기가 닥치기 전부터 큰 폭으로 줄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집계 결과 지난달 동유럽 대상 수출은 9억2999만 달러(약 1조3856억 원)로 전년 동기 대비 50.8%나 감소했다. 전체 수출이 2008년 1월보다 33.8% 줄어든 것과 비교해도 동유럽 지역 수출 감소 폭이 훨씬 크다.

동유럽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잇달아 감산에 나서고 있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에 따르면 기아차 슬로바키아 공장과 현대차 터키공장에서 지난달 생산한 자동차는 8350대, 1776대로 지난해 1월보다 각각 53.6%, 66.4%나 줄었다. 아직 준공식도 치르지 않은 현대차 체코공장의 경우 가동 첫 달인 지난해 11월 6330대를 생산했지만 12월 5712대, 올 1월 5560대로 생산량을 계속 줄이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향후 시장 상황에 따라 공장별 생산물량을 조정하는 등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헝가리, 슬로바키아 공장은 이 회사 전체 TV 생산량의 20∼30%를 책임지고 있는 주요 생산거점. 삼성전자 측은 “현재 동유럽 자체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며 “다만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공장은 시장이 2배 이상 큰 서유럽 물량도 함께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큰 동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2007년 폴란드 브로츠와프에 LG디스플레이와 함께 ‘액정표시장치(LCD) 클러스터’를 구성한 LG전자도 좌불안석이기는 마찬가지. LG전자는 이곳에 5억 유로(9600억 원) 이상을 투자해 중국 난징(南京)과 경기 파주시에 이은 LG의 3대 LCD 클러스터로 키웠다. 당초 동유럽 진출의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됐지만, 상황이 악화될 경우 능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애물단지’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LG전자는 이미 폴란드 므와바에도 연간 400만 대 TV를 생산할 수 있는 대형 생산라인을 갖고 있다.

대우일렉트로닉스도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등의 TV 및 냉장고 시장이 40% 이상 급감함에 따라 이 지역 판매계획을 당초보다 10∼20% 하향 조정했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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