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교체 과도기<5·끝>좌파 이념공세 뚝심 대처

  • 입력 2008년 6월 6일 02시 53분


‘수십만명 反核시위’정면돌파…獨통일 초석 마련

- 헬무트 콜 前독일 총리

취임 이듬해 “美핵미사일 배치 반대” 대규모 시위로 위기

“소련 팽창 막아야” 국민 설득… 공산주의 몰락에 큰 기여

《독일인들에게 ‘통일 총리’로 칭송받는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1982∼98년 재임). 그는 특유의 뚝심과 뛰어난 정세판단력을 활용해 절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독일 통일을 1990년 이뤄냈다. 유럽연합(EU) 단일 화폐인 유로의 탄생과 유럽중앙은행 설립에 밑바탕이 된 유럽경제통화동맹(EMU)도 콜 전 총리의 재임기간에 그 틀과 내용이 갖춰졌다. 그러나 그도 총리 취임 이듬해 수십만 명의 시위대가 나선 이념 공세로 위기를 겪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정면 돌파를 선택한 그의 결단력은 결과적으로 동서독 시민들의 염원이었던 통일뿐 아니라 공산주의 몰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3년만에 좌우 정권 교체=1982년 10월 기독민주당(기민당·CDU) 소속 콜 총리의 취임은 서독 역사상 두 번째의 좌우 정권교체였다.

우파로서는 1969년 사회민주당(사민당·SPD) 소속 빌리 브란트 총리 취임 당시 처음으로 잃었던 정권을 13년 만에 되찾아온 이벤트였다. 당시 사민당의 연정파트너였던 중도보수 성향의 자유민주당(자민당·FDP)이 경제 문제로 갈등 끝에 사민당의 손을 뿌리치고 기민당과 손을 잡은 것.

그러나 콜 전 총리의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위기는 ‘내치(內治)’가 아닌 안보 문제에서 일어났다. 계기는 1983년 미국 핵미사일의 서독 배치 문제를 놓고 일어난 독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핵 시위였다.

당시 소련은 미국의 군사력 증강정책에 맞서 신형 중거리 핵미사일 SS-20 수백 기를 중부 유럽을 겨냥해 배치했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도 미국의 중거리 핵미사일 ‘퍼싱Ⅱ’ 100여 기를 서독에 배치하겠다고 맞섰다. 독일을 무대로 핵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서독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서독을 찾아 의회 연설을 통해 소련의 위협에 맞선 핵미사일 배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지지를 호소했지만 상황은 오히려 악화됐다. 반핵 시위대의 규모는 갈수록 불어나 한 번에 30만, 40만 명까지 모였다. 12월로 예정된 퍼싱Ⅱ 미사일의 서독 배치가 가까워질수록 소련의 전쟁 위협 목소리도 커져갔다.

▽위기를 기회로 반전=당시 서독 시민들의 불안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13년 만에 정권을 잃은 사민당과 진보 지식인들이었다.

사민당 내 좌파 성향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던 오스카 라퐁텐은 퍼싱Ⅱ 미사일의 서독 배치 반대와 서독의 나토 탈퇴, 서독 내 모든 원자력발전소의 폐쇄를 강력히 주장했다. 소설 ‘양철북’으로 유명한 귄터 그라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하인리히 뵐 등 대중적으로 영향력 있는 진보 작가들도 정부의 미국 핵미사일 배치 방침에 반대하며 시위대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에 맞서 콜 전 총리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그는 “다른 유럽 국가도 퍼싱Ⅱ 미사일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에서 서독마저 이를 거부하면 결국 나토 방위체제의 와해로 이어지고, 이는 소련의 팽창 위협을 허용해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시민들을 설득했다. 퍼싱Ⅱ 미사일은 1984년 1월부터 1985년까지 예정대로 배치됐고, 반대 시위는 잦아들었다.

당시 그의 결단이 국제정세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 중요성에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불합리한 경제구조 속에서 유럽 중거리 미사일 경쟁을 비롯한 군비경쟁을 강행할 수 없었던 소련은 결국 1988년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중거리 지상기지 미사일을 모두 없애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서독 시민들의 미사일 불안이 해소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콜 총리에 대한 신뢰는 한층 높아졌다.

▽미-소 양측의 ‘존중’ 얻어낸 소신=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무리한 군비 경쟁으로 멍든 소련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동유럽에서의 영향력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아가 1989년 소련이 동독에서 손을 떼기로 마음먹은 뒤 미국이 독일 통일을 지원했던 데는 퍼싱Ⅱ 배치 과정에서 미국이 느낀 콜 총리와 독일에 대한 고마움이 크게 반영됐다고 당시 미 행정부 인사들은 훗날 증언했다.

반면 퍼싱Ⅱ 배치 반대 운동을 관철하지도, 이 과정에서 국민 대다수의 마음을 얻지도 못한 사민당은 1980년대 후반 내내 비판에 직면했다. 사민당이 40대의 ‘젊은 피’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를 내세워 정권을 되찾은 것은 16년 만인 1998년이었다. 그나마 통일의 후유증으로 불가피했던 실업률 증가에 따라 반사이익을 본 측면이 컸다.

한편으로는 콜 전 총리의 핵미사일 배치 결정이 결과적으로 사민당에 정권을 넘겨주는 단초를 마련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1983년 서독의 반핵 시위는 핵 폐기와 생태 및 환경오염 반대 등을 줄곧 주장해온 녹색당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졌고, 녹색당은 연방의회에 처음으로 진출하게 된다.

콜 전 총리의 결정이 녹색당의 의회 진출 계기가 된 셈이다. 콜 전 총리는 1998년 총선에서 사민당이 녹색당과 연합해 연정 창출에 성공함에 따라 정권을 내놓아야 했다.

이상록 기자 myzodan@donga.com

슈뢰더-메르켈 “비록 정당 다르지만”

개혁 프로그램 승계해 경제병 치유

■ 독일 경제 살린 두 총리

‘유럽의 병자에서 새로운 성장 모델로.’

사민당 소속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와 기민당 소속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1990년대 이후 경제 불황과 고실업으로 깊은 속병을 앓던 독일 경제를 살려냈다. 이들의 성공은 이해세력의 강한 반발을 두려워하지 않고 ‘독일병’의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내 치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슈뢰더 전 총리는 1998년 집권한 뒤 “독일이 되살아나려면 실업률을 줄여야 한다”며 노동시장 개혁과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2002년 노동시장 개혁안을 마련한 그는 2003년 3월 연방 하원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개혁 프로그램인 ‘어젠다 2010’을 발표했다.

‘어젠다 2010’에는 사회 경제 의료 세제 등 각 분야의 중장기 개혁방안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발표되자마자 노동계는 물론이고 사민당 내부에서도 거센 반발이 일었다. 노동자의 해고 제한 규정을 완화해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하고, 실업자가 특별한 이유 없이 추천받은 일자리를 거부하면 불이익을 주며 실업수당을 대폭 축소하는 내용을 담은 ‘하르츠Ⅳ법’ 등 사민당의 기존 정책과 상반되는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 사회복지제도를 고쳐 퇴직연금 수령 개시 연령을 기존의 65세에서 67세로 올리고, 의료보험료의 개인 부담을 늘린 것도 논란을 불러왔다.

슈뢰더 전 총리는 주위의 강한 반발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개혁정책을 추진했지만 성과는 즉각 나타나지 않았다. 독일의 재정적자는 크게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실업률마저 13%까지 치솟았다. 사민당 지지율도 곤두박질쳤다.

결국 슈뢰더 전 총리는 2005년 11월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해 기민당 출신 메르켈 총리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퇴임했다.

슈뢰더 전 총리의 퇴임으로 ‘어젠다 2010’은 한때 물거품이 될 위험에 처했지만 메르켈 총리는 이런 걱정을 처음부터 씻어냈다. 취임 직후 그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공무원들의 성탄절 보너스를 50%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꾸준히 추진된 개혁은 2006년부터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6년 독일의 경제성장률은 2.7%로 2000년대 들어 최고치를 기록했다. 2005년 13%까지 치솟았던 실업률은 지난해 8.3%로 크게 떨어졌다. 2000년 이후 만성적인 적자상태였던 재정수지도 2003년 이후 계속 호전돼 올해는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소속 정당이 다른 전현직 두 총리의 추진력은 독일이 유럽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든 발판이 된 셈이다. 이는 눈앞의 이익이나 어려움에 집착하지 않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가의 체질 개선에 착수했던 ‘뚝심’의 승리로 평가된다.

이상록 기자 myzod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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