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 한인 전사자 2만여명 그냥 잊혀지게 할순 없었죠

  • 입력 2008년 5월 28일 03시 01분


자신이 정리한 명부를 들어 보이는 기쿠치 히데아키 씨. 그는 이름 없이 죽어간 한반도 출신 군인과 군속들의 흔적을 10여 년에 걸쳐 정리해 왔다. 사진 제공 아사히신문
자신이 정리한 명부를 들어 보이는 기쿠치 히데아키 씨. 그는 이름 없이 죽어간 한반도 출신 군인과 군속들의 흔적을 10여 년에 걸쳐 정리해 왔다. 사진 제공 아사히신문
日 60대 기쿠치씨 명부 정리

희생자 대부분 20대 젊은이 ‘충격’

10년 넘게 사망장소 일시 등 입력

“그냥 잊혀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조금씩 작업하다 보니 10여 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일제에 의해 군인이나 군속으로 강제 동원됐다가 전사한 조선인 2만수천 명의 명부를 한 평범한 일본인이 완성했다고 아사히신문이 27일 보도했다.

도쿄(東京) 도 다치카와(立川) 시에 사는 전직 학원 강사 기쿠치 히데아키(菊池英昭·66) 씨. 그가 완성한 명부를 보면 식민지 시절 강제 동원된 조선인이 언제 어디서 사망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기쿠치 씨는 앞으로 이 자료에 해설을 곁들여 출판할 계획이다. 옛 일본군 전사자 명부는 일본 후생노동성이 보관하고 있지만 가족 외에는 볼 수 없다.

기쿠치 씨는 일본 외무성이 1971년 한국 정부에 전달한 ‘구 일본군 재적 조선인 사망자 연명부’를 한국의 국립대와 관련 유족회 등에서 복사한 뒤 사망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름과 사망일시, 장소, 소속, 출신지별로 일일이 분류해 왔다.

일본이 한국 정부에 전달한 명부는 특별한 순서 없이 손으로 작성한 것이어서 중복이나 누락된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는 이를 일일이 정리해 컴퓨터에 입력했다.

기쿠치 씨가 명부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1993년경.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이 제기한 피해보상 청구 재판을 알게 되면서였다. 끝없이 이름이 이어지는 전사자들이 모두 20대 젊은이라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

“대학을 나와 취직해 불편 없이 살고 있는 제 처지와 비교해 보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목숨을 잃었을까, 한 사람씩 정리하다 보면 전쟁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 결심대로 역사적 사실이나 연결고리가 새롭게 떠오르기도 했다. 한 예로 명부를 정리하던 중 대부분 경상남도 출신인 113명이 모두 1945년 3월 10일 도쿄의 한 해군숙사에서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됐다. 기쿠치 씨는 이들이 도쿄대공습에 희생됐다고 해석했다. 그는 2006년 겨울 한국 출신 강제동원자의 가족으로 구성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에 완성 직전인 명부를 넘겨줬고 이 명부 덕에 몇몇 유족이 육친의 소식을 알게 됐다. 한 유족은 고맙다며 소주 2병을 보내오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된 한반도 출신 군인 군속은 모두 24만3992명으로 이 중 약 2만2000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대부분은 기쿠치 씨의 명부에 포함됐지만 그는 “앞으로도 정확한 희생자 수를 계속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사히신문은 “‘잊히지 않도록 하겠다’는 일념으로 편집한 명부가 바다 건너 두 나라를 잇는 가교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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