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왕 푸틴’의 그늘

  • 입력 2008년 5월 14일 02시 59분


메드베데프가 이끌 내각 명단에

푸틴 임명 관료들 줄줄이 올라

“대통령 교체가 실감 나지 않는다.”

12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새 러시아 대통령이 이끌 내각 명단이 나오자 러시아 정치비평가와 시민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이날 부총리와 장관급 고위 공무원 명단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신임 총리가 대통령 시절 임명했던 관료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인사의 백미는 메드베데프 대통령을 모실 대통령행정실장이었다. 신임 세르게이 나리슈킨 행정실장은 친(親)푸틴계 인사. 새 대통령과 실세 총리의 양두(兩頭)체제에서 크렘린의 핵심자리인 행정실장만은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직접 챙길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푸틴 전 대통령 시절 유명한 세도가였던 이고리 세친 전 대통령행정실 부실장과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전 연방보안국(FSB) 국장 등은 줄줄이 승진했다.

이날 인선에서 친(親)메드베데프 인사로 분류될 수 있는 인물은 알렉산드르 코노발로프 법무장관뿐이었다.

인사 절차에서도 푸틴 총리의 독주가 두드러졌다. 푸틴 총리는 이날 크렘린에서 메드베데프 대통령을 만나 자신이 준비한 명단을 일방적으로 밝혔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가끔 “우리가 두 달간 준비했다”고 언급했으나 주로 푸틴 총리의 말을 듣는 자세를 보였다.

러시아 국영 TV들도 푸틴 총리의 얼굴과 말에 초점을 맞춰 뉴스를 전달했다.

모스크바의 한 시민은 “TV에서 푸틴 총리가 메드베데프 대통령을 압도하고 있다”며 “진짜 대통령이 바뀌었는지 모를 지경”이라고 말했다.

정치평론가 유리 기렌코 씨는 “크렘린과 총리실의 권력 양분 구도는 현실 정치를 모르는 이상론자의 관념적 유희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푸틴 총리의 거침없는 행보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13일 자신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해 해군 수상함과 잠수함 건조 현장을 둘러볼 예정이라고 인테르팍스 통신이 전했다. 이를 두고 제정러시아 당시 해군 함정 건조 과정을 직접 감독했던 표트르 대제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시민들도 많다.

평론가 파벨 이바노프 씨는 “대통령을 두 번 지낸 푸틴 총리가 ‘국가지도자’로서의 지위를 굳히는 한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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